[단독] 트럼프 '한국어 동영상'엔 동해 아닌 일본해

 12일 오후 4시 6분 싱가포르. 전 세계의 시선이 센토사 섬 카펠라 호텔로 몰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세기의 회담을 마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앞두고서다.
12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보여줬다는 동영상 속 동해 표기가 '일본해(Sea of Japan)'로 돼 있다. 'japan'이라는 표기는 카메라의 포커스에 맞지 않아 흐릿하게 보인다. 동해의 영문명인 'East sea'는 병기조차 돼 있지 않다. [백악관 동영상 캡처]

12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보여줬다는 동영상 속 동해 표기가 '일본해(Sea of Japan)'로 돼 있다. 'japan'이라는 표기는 카메라의 포커스에 맞지 않아 흐릿하게 보인다. 동해의 영문명인 'East sea'는 병기조차 돼 있지 않다. [백악관 동영상 캡처]

 
그때 프레스센터에는 ‘쿵쿵’ 소리와 함께 전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을 통해 동영상이 상영됐다. 기자들은 웅성거렸다. 북한이 핵을 포기할 때 얻게 될 풍요로운 미래의 모습을 담은 한국어 영상이었다. 같은 영상은 영어로 한 번 더 상영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상영이 끝나자마자 리얼리티쇼의 주인공처럼 조명을 받으며 단상에 올랐다.
 
그는 “영상을 김 위원장에게 보여줬다”고 했다. “회담 마무리 시점에 김정은 위원장에게 보여줬는데 김 위원장 반응이 아주 좋았다고 생각한다”며 자랑스러워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역사적 북미정상회담 후 공동합의문에 서명을 한 뒤 기자회견을 마치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싱가포르 국제미디어센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역사적 북미정상회담 후 공동합의문에 서명을 한 뒤 기자회견을 마치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싱가포르 국제미디어센터]

그런데 전 세계인이 함께 지켜봤던 이 영상에는 중대한 오류가 있다.
 
북ㆍ미 회담에 등장한 日本海
 
4분 30초짜리 영상이 시작된 지 40여초 뒤. 영어로 지명이 표기된 한반도 지도가 영상에 노출됐다. 채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편집이었다.
 
그런데 한반도 오른쪽 바다의 지명이 ‘Sea of Japan’으로 돼 있었다. 일본이 주장하는 동해 표기인 ‘일본해(日本海)’를 뜻하는 영어명이다.  
 
영상에는 ‘Japan’이라는 표기에 포커스를 두지 않아 흐릿하게 나왔지만, 명백히 일본해 표기였다. 동해(the East Sea)의 단독 표기는 물론, 일본해 옆에 동해를 병기하지도 않은 지도였다.
 
이날 상영된 영상물은 역사적인 북ㆍ미 회담에서 북한의 최고 지도자를 설득하기 위해 제작 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아이패드에 저장했다가 회담 중 김 위원장에게 보여줬을 만큼 치밀한 사전 계획에 따라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영상에 미국은 한ㆍ일 간 외교적으로 극도로 민감한 사안인 일본해 표기를 쓴 셈이다.  
 
Destiny Pictures 작품?
 
영화의 예고편처럼 제작된 영상에는 ‘Destiny Pictures production’이라는 자막과 함께, “데스티니 픽처스가 제작했습니다”는 내레이션이 등장한다.
 
데스티니 픽처스라는 영화사는 실제로 있다. 미국 언론들은 즉각 LA에 있는 15년 된 소규모 독립영화 및 방송 제작사인 이곳의 설립자 마크 카스탈도를 전화 인터뷰해 제작 경위를 물었다.
 
그러나 카스탈도는 뉴욕타임스(NYT)에 “우리는 그 영상과 아무 관계가 없다. 나는 정치적 인물도 아니고 그런 프로파간단(선전ㆍ선동) 영상은 제작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과거 영화사를 차리기 전 카지노업에 종사했던 전력과 관련해서도 “트럼프가 (사업가 시절) 했던 카지노와도 무관하다”며 트럼프 대통령과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한 영상에 등장하는 'Destiny Pictures'의 로고. [백악관 동영상 캡처]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한 영상에 등장하는 'Destiny Pictures'의 로고. [백악관 동영상 캡처]

LA에 있는 실제 '데스티니 픽처스'가 제작한 영화에 등장하는 로고. 공교롭게 일본의 전범기인 '욱일승천기'와 유사하다.

LA에 있는 실제 '데스티니 픽처스'가 제작한 영화에 등장하는 로고. 공교롭게 일본의 전범기인 '욱일승천기'와 유사하다.

 
실제로 ‘트럼프 동영상’에 나온 회사 로고와 실제데스티니 픽처스의 로고는 완전히 다르다.  
공교롭게 ‘정치적이지 않다’고 했던 카스탈도의 회사가 사용하는 로고는 과거 일제가 사용했던 전범기인 ‘욱일승천기’를 형상화한 모습을 하고 있다.

 
 
미국의 SNS에는 전날 싱가포르에서 상영된 동영상과 관련한 댓글에 나치의 전범기와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을 합성한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트위터 캡처]

미국의 SNS에는 전날 싱가포르에서 상영된 동영상과 관련한 댓글에 나치의 전범기와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을 합성한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트위터 캡처]

백악관이 만든 허구의 회사?
 
NYT는 이번 동영상에 등장하는 데스티니 픽처스라는 제작사에 대해 “백악관 NSC가 비유적으로 지어낸 것으로 추정된다”며 “실제 데스티니 픽처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만든 셈”이라 보도했다.
 
‘운명’을 뜻하는 ‘Destiny’를 활용해 김정은 위원장에게 비핵화에 따른 풍요로움이 운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비유적으로 전달하려는 설정이라는 뜻이다. 물론 LA에 있는 영화사가 아닌 백악관이 제작을 의뢰한 같은 이름이 또 다른 제작사가 존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12일 회견에서 해당 영상에 대해 “우리가 만든 영상”이라고 말했다.  다만 ‘우리’가 미국의 영화사나 제작사인지, 백악관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갈 길 먼 동해와 독도
 
일본은 지난달 15일 2018년 판 외교청서를 각의(국무회의)에 보고하면서 동해에 대해 “‘일본해’가 국제법적으로 확립된 유일한 호칭”이라며 외교 도발 수위를 높였다. 지난해에 있던 “가장 중요한 이웃 나라”라는 한ㆍ일 관계와 관련된 표현도 삭제했다. 그러면서 “다케시마(독도의 일본명)는 역사적 사실에 비춰봐도, 국제법상으로도 명확히 일본 고유의 영토”라며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일본 외교 청서의 한국 관련 부분[서승욱 특파원]

일본 외교 청서의 한국 관련 부분[서승욱 특파원]

 
한 달 전인 4월 백악관은 ‘동해와 일본해 병기’를 요구하는 한국 교민 10만 8300명의 청원을 기각했다.
 
당시 일본의 산케이 신문은 백악관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 “정부 기관인 미국지명위원회(BGN)가 각각의 바다에 대해 관례로 한가지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일본해를 공식 표기로 계속 사용할 것”이라는 백악관 관계자의 발언을 싣기도 했다.
 
그 무렵 시진핑 국가 주석을 만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은 사실 중국의 일부였다더라”고 언급한 대목이 알려지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