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호의 시시각각] 대재앙 맞은 미국 외교

강찬호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미국의 대북외교 70년 사상 최악의 협상.”
 
서울의 한 전직 고위 외교관의 일갈이다. 그저께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4개 항을 보면 그 말이 지나치지 않다. 첫 문장부터 잘못됐다. 범죄(핵 도발)를 저지른 북한에 큰 떡을 2개(북·미 관계 수립, 평화체제 구축)나 던져줬다. 핵심인 비핵화는 세 번째로 저만치 밀렸다. 게다가 북한 아닌 ‘한반도’ 비핵화다. 북한이 “주한미군과 핵우산부터 철수시키면 비핵화에 나서겠다”며 버틸 구실을 대놓고 준 것이다. 종전선언이 빠진 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남북 간 종전선언을 담은 4·27 ‘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해 “미국이 종전선언에 간접 동의한 것”이란 해석을 낳을 빌미를 준 건 또 다른 패착이다. 북한이 선심 쓰듯 던져준 미군 포로 유해 발굴 조항은 북·미 외교 당국 국장 선에서나 논의할 마이너 이슈다.
 
“정상회담의 ABC도 모르는 아마추어 대통령의 즉흥 외교가 미국의 안보에 치명타를 가했다”는 비판이 워싱턴 조야를 뒤덮은 것도 당연하다. 오죽하면 미 국무부에서 비둘기파를 대표해온 조셉 윤 전 대북정책 특별대표조차 “회담에서 트럼프가 얻은 성과가 뭐냐”고 물은 CNN 기자에게 “낫싱(Nothing)”이라고 답했겠는가.
 
반대로 김정은은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다. 조부도 부친도 못해 본 미국 대통령과 상봉한 사실 하나만으로 김씨 왕조 사상 최대 업적을 이룬 왕으로 기록될 것이다. 김일성은 ‘전직’ 미국 대통령 카터의 방북에도 감읍해 ‘부인’ 김성애를 대동하고 버선발로 맞았다. 자신의 전용 요트에 카터를 태우고 대동강을 돌았고 평양의 한 거리를 ‘카터 가’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이럴진대 현직 미국 대통령과 만나 외교적 압승을 거두고 개선한 김정은의 위상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것이다. 그가 꿈꾸는 ‘50년 집권’ 계획에 청신호가 켜진 셈이다.
 
북·미 정상회담 결과는 우리 정부의 거간 역할 탓도 컸다. 청와대 외교안보 라인과 친한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3월 12일 방송 인터뷰에서 ‘CVIG’(완벽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미국의 대북 체제보장)라는 말을 처음 꺼냈다. 얼마 안 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이 말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미국 외교 수장이 한국 정부의 슬로건 전도사가 된 것이다.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우리 안보 라인은 폼페이오에게 큰 공을 들였다. 특히 미국의 안보 국익과 관련된 중요 정보를 취득하고 이를 워싱턴에 알려줘 트럼프 행정부가 위험 상황을 미연에 막을 수 있게 해준 게 히트였다. 이를 고마워한 폼페이오는 서훈 국정원장과 절친이 됐고, 우리 정부의 슬로건인 ‘CVIG’나 ‘선 대북 배려, 후 비핵화’를 받아들여 워싱턴 매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는 것이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가뜩이나 부실한 협상을 구실로 남북 관계를 과속하면 재앙이 우려된다. 당장 종전선언이 뜨거운 감자가 될 것이다. 정부는 40여 일밖에 남지 않은 7·27(휴전협정 체결일)을 목표로 ‘남·북·미 정상 종전선언’ 이벤트를 밀어붙일 기세다. 이게 안 되면 늦어도 9월 말 뉴욕에서 열릴 유엔 총회에선 반드시 성사시킬 생각일 것이다. 시점도 끝내준다. 세 정상이 유엔 총회장에서 “70년 가까이 이어져 온 한국전쟁을 끝낸다”고 선언하면 트럼프에겐 한 달 뒤 치러질 중간선거에 큰 호재가 되고, 두 달 뒤 발표될 노벨 평화상도 떼놓은 당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북한이 그때까지 비핵화 조치를 제대로 해 진정성을 입증하는 경우로만 한정돼야 한다. 북한이 비핵화 약속을 실천하지도 않았는데 종전을 선언해 준다면 대한민국 안보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릴 것이다.
 
강찬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