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SUNDAY편집국장레터]애플은 착해서 성공한 게 아니다

 함께 길을 가던 아들 지네가 아빠 지네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제가 보니 아빠의 스물 다섯번째 다리가 땅에 닿고 나서 서른 일곱번째 다리가 땅에 닿더군요. 서른 일곱번째 다리 다음에는 어떤 다리가 땅에 닿지요?” 아빠 지네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던 아들의 질문을 받고는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다시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VIP 독자 여러분, 중앙SUNDAY편집국장 박승희입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이자 프린스턴대 교수인 폴 크루그먼의 ‘마비된 지네의 우화’ 얘기로 레터를 시작합니다. 100개의 다리를 가진 지네가 원리를 생각하지 않을 때는 마음대로 다리를 조정하며 걸었지만, 그 많은 다리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 원리를 고민하다가 다시는 제대로 걸을 수 없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이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혁신성장과 규제혁신 토론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2018.3.13/뉴스1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이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혁신성장과 규제혁신 토론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2018.3.13/뉴스1

 
경제 쪽으로 안 좋은 소식이 동시다발로 밀려들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어제(28일) 청와대에서 열 예정이던 ‘제2차 규제혁신 점검회의’가 막판에 연기됐습니다. ‘관(官)’의 준비가 미흡해서입니다. 통계청이 오늘 발표한 ‘5월 산업활동동향’을 보면 5월 설비투자가 4월보다 3.2% 감소했습니다. 3개월 연속 감소입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매출액 기준 6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7월 전망치 90.7을 기록했습니다. 6월의 95.2보다 큰 폭으로 하락했는데, 17개월만에 최저치라고 합니다.

정부의 진단은 아직 안심해도 된다고 합니다. 기획재정부에선 ‘수출이 잘 되고 있는데다, 추경 예산이 본격적으로 집행되는 만큼 경기 회복세가 가시화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기재부의 진단을 믿고 싶습니다. 경기 회복을 싫어하는 국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경제 주체들이 느끼는 체감 심리가 심상치 않아서입니다. BSI는 생산과 투자를 주도하는 기업들의 답변을 토대로 합니다. 그게 17개월만에 최저라면 기업보다 늘 낙관적인, 낙관적이어야만 하는 정부의 주장을 그대로 믿는 건 위험합니다. 중앙일보가 경제전문가 4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28명이 경기 하강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답했습니다(6월21일자 기사).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는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의 중요한 줄기입니다. 없는 사람들의 소득을 늘리는 정책을 추진하고, 공정하지않은 경제 현장을 고친다는 건 당연한 정부의 책무입니다. 문제는 이게 슬로건으로 증폭되고, 정치 논리와 결합하면서 법률보다 더 강한 도그마로 현장에서 받아들여진다는 겁니다. 요즘 기업인들을 만나면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를 ‘친(親)노조, 반(反)기업’ 정책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합니다. 근로소득자라면 반대할리 없는 최저임금제와 주52시간 근무제를 놓고도 그런 프레임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부는 아니라지만 기업이나 시장이 그렇게 받아들이고 인식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 인식이 설비투자를 줄이고, BSI를 낮추고 있습니다.  
정치 시장이나 권력 시장은 선악으로 종종 구분됩니다. 그 프레임이 제대로 먹혀들 때 심판자인 국민의 표를 얻어 권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업들이 경쟁하고, 개인들이 소비하는 경제 시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애플은 선(善)했기 때문에 더 잘 팔렸고, 소니가 외면받은 건 악(惡)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경제 시장의 작동 원리는 경쟁력이고, 혁신이고, 소비자의 선택입니다. 그래서 선악의 잣대로 대한민국의 기업이나 경제를 다루는 건 자칫 크루그먼이 말한 ‘지네의 우화’처럼 원치않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우리 기업들은 ‘서른 일곱번째 다리 다음에 어느 다리를 땅에 닿게할지를 생각하다 걷지 못하는 아빠 지네’처럼 마비되고, 움츠러들고 있습니다. 대선 때 문재인 후보를, 지난 지방선거 때 민주당을 찍었다는 중소기업인들도 경제 얘기만 나오면 아우성입니다. 공정이란 잣대에서 자유로운 기업이 없고, 관행이 적폐와 동일시되는 분위기에 위축돼 있습니다.  

서울 남산 밀레니엄 힐튼 그랜드 볼륨에서 열린 '2015년 한국을 빛낸 창조경영' 시상식.2015.03.17 김상선

서울 남산 밀레니엄 힐튼 그랜드 볼륨에서 열린 '2015년 한국을 빛낸 창조경영' 시상식.2015.03.17 김상선

이쯤에서 기업과 기업인들의 사기를 생각하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당장 급한 게 규제 철폐(혁신이란 말은 너무 온건합니다. 규제는 없애는 게 원칙이 돼야 합니다)입니다. 오늘 창조경영대상 시상식에 다녀왔습니다. 놀랍도록 혁신적이고, 경쟁력 있는 강소기업 CEO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뿌듯했습니다. 문제는 이 분들의 소원이 ‘규제 좀 풀어달라’는 겁니다. 바이오산업이 중요하다면서 의료 데이터를 틀어쥐고 있는 질병관리본부, 규제를 푸는 건 모험이니 절대로 사고치면 안된다며 규제를 끌어안고 있는 행정 때문에 속이 타들어 간다고 합니다.  
돌아봅니다. 아이폰과 갤럭시S가 출시된 건 2008년, 2009년입니다. 불과 그 10년만에 우리는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10년 뒤인 2028년엔 또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우리 삶에 밀려들까요. 민주화가 나쁜 가치가 아니듯이 공정경제는 중요한 가치입니다. 문제는 그 것만으로 부족하고, old할 수 있다는 겁니다. 노동의 가격을 ‘52시간’ 같은 시간의 개념으로 매기는 게 언제까지 가능하겠습니까. AI나 로봇이 우리 삶의 깊숙한 곳으로 밀려들 때 공정의 가치만으로 그들을 통제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조금 더 미래의 얘기, 우리 아들딸들이 사는 시대의 얘기를 이제부터는 전향적으로 더 고민해 봐야 합니다.  

중앙SUNDAY는 이번 주 대한민국의 당당한 Value Chain으로 등장한 ‘아이돌의 세계’를 스페셜리포트로 준비했습니다. 한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로 K팝(16%)이란 답이 가장 많았고, 북한ㆍ전쟁위험(8.5%)-IT산업(7.7%)-드라마(7%) 는 그 다음이라고 합니다. 아이돌이 투자 대상이 되고, 홍대 앞에는 한국 아이돌의 춤을 배우려는 세계인들의 교습소가 성행하고 있다는 얘기를 담았습니다. 러시아에서 귀국한 축구 국가대표팀 얘기도 특집으로 준비했습니다.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