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윤의 시시각각] 쩨쩨한 보수

김종윤 논설위원

김종윤 논설위원

난데없이 ‘먹방(먹는 방송)’ 타령이다. 침 꼴깍 유혹하는 장면은 시청률이나 클릭 신화를 좇는 감미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쩌다가 먹방을 규제하는 게 국가주의 아니냐는 거창한 정치 담론으로 비화했다.
 
김병준 자유한국당 혁신비상대책위원장이 국가주의 화두를 들고나온 타이밍은 절묘했다. 확신으로 똘똘 뭉친 권력자들의 공통점은 ‘내 신념만 옳다’라는 확증 편향이다. 문재인 정부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는 판단의 문제이니 옳고 그름을 따지는건 부질없는 짓이다. 
 
문제는 따로 있다. 투철한 사명감이 넘치다 보니 양보와 타협은 없다. 꽉 막히면 충돌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나라는 시끄럽고 국민은 피곤하다.
 
이럴 때 김 위원장이 치고 나온 ‘탈(脫)국가주의’ 프레임은 청량제처럼 톡 쏘는 맛이 있다. 국가주의 논쟁의 본질은 보수와 진보의 이념 논쟁이다. 난파 위기의 한국 보수가 이슈를 만들었다는 점만으로도 진일보했다는 평을 들을 만하다.
 
현 보수 위기의 근원은 ‘보수 정신’의 붕괴 때문이 아니다. 보수를 부르짖는 ‘그들’의 시대착오적 행태가 보수를 매력 없는 족속으로 끌어내렸다.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군인권센터장의 성 정체성을 문제 삼았다. 이건 인격 모독이다. 그 당의 전 대표는 막말 퍼레이드로 ‘보수=수구 꼴통’이라는 새로운 등식을 만든 주역이다. 생각이 꾀죄죄한 이들에게서 품위 따위는 언감생심이다.
 
보수는 답답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전통의 뿌리를 존중하면서 점진적 변화를 지향하는 게 보수 정신이다. 보수가 한국에서 수구 꼴통으로 전락한 건 닫힌 그들끼리 동종 교배만 되풀이했기 때문이다.
 
이런 위기에서 노무현의 사람이었던 김 위원장이 등판했다. 그는 한때 진보 정권의 성공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이다. 이런 그가 침몰 위기에 빠진 보수호(號)를 구할 선장이 된 건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그가 내세운 탈국가주의 프레임은 오랜만에 보수 진영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런데 2% 부족하다. 먹방이나 초중등학교 자판기를 재료로 내세운 게 어째 쩨쩨해서다.
 
19세기 중반 영국 토리당을 이끌던 로버트 필은 ‘운명의 순간’을 맞았다. 토리당의 지지층인 지주계급은 곡물 가격 하락을 막기 위해 외국산 곡물의 수입을 금지하는 곡물법을 옹호했다. 토리당이 보호무역을 지지하는 정당이었던 이유다. 
 
하지만 산업혁명의 기운이 움트던 당시 노동자의 임금을 낮게 유지하려면 곡물값이 싸야 했다. 새로 등장한 부르주아 계층은 곡물법 폐지를 주장했다. 필은 시대의 흐름을 깨달았다. 과감히 깃발을 바꿨다. 곡물법 폐지를 결정하고 당의 노선을 자유무역으로 전환했다. 
 
낡은 지배층인 지주의 당에서 새로운 계급인 부르주아의 당으로 외연을 넓힌 토리당은 근대 정당인 보수당으로 진화했다. 한 개혁가의 담대한 혁신이 보수 정당을 역사로 불러온 것이다.   
 
김병준 위원장은 지난 6월 한 칼럼에서 ‘정부 여당은 인권·평화·상생·환경 등 가치를 얘기한다. 그런데 한국당을 비롯한 (보수)야당은 보수적 대안을 내놓지 않고 이런 가치를 추구하는 것에 대해 빈정거린다’고 썼다. 그는 한국 보수의 퇴행성을 정확히 읽었다. 이런 가치는 인류 보편적인 관심사다. 왜 보수는 이 가치를 외면하고 진보에 헌납하는가. 
 
김 위원장은 ‘싫든 좋든 역사는 다양성을 향해, 자율을 존중하는 쪽으로 흐른다’고 했다. 끝 모를 나르시시즘에 빠진 한국 보수를 혁신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인간과 사회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보수가 있어야 진보도 성숙해진다. 
 
미국의 사상가 러셀 커크는 『보수의 정신』에서 “사회가 건강해지려면 개선하려는 추진력과 보존하려는 엔진이 같이 작동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새는 왼쪽과 오른쪽의 날개를 함께 움직여서 난다. 
 
김종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