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에 무슨 일···'무사귀환' 병풍까지 등장한 사연

지난 12일 경북 상주시청 로비에 전시된 훈민정음 서각병풍. [사진 상주시]

지난 12일 경북 상주시청 로비에 전시된 훈민정음 서각병풍. [사진 상주시]

 
지난 12일 경북 상주시청 로비에 병풍 하나가 전시됐다. 은행나무 목판에 글자를 새긴 서각병풍이다. 가로 264㎝, 세로 190㎝ 크기의 서각 병풍에 새겨진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 보니,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훈민정음 서문이 적혀 있었다.
  
병풍이 전시된 목적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무사귀환'이다. 조선 세종 때인 1446년 출간된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은 서울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철통보안 속에 잘 보관되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란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상주시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하나 더 있어서다.
 
지금 경북 상주시 어딘가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또 다른 판본이 숨겨져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간송미술관에 있는 '간송본'과 구별하기 위해 '상주본'이라고 부른다. 상주본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이를 꽁꽁 숨겨두고 10년째 세상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 법원이 반환을 명령해도, 상주시장이 소유자를 찾아가 설득을 해봐도 아직 소득이 없다.
훈민정음 간송본(왼쪽)과 훈민정음 상주본. 위쪽과 아래쪽 여백의 차이를 알 수 있다. 간송본은 여백이 훨씬 좁다. [연합뉴스]

훈민정음 간송본(왼쪽)과 훈민정음 상주본. 위쪽과 아래쪽 여백의 차이를 알 수 있다. 간송본은 여백이 훨씬 좁다. [연합뉴스]

 
훈민정음 서각병풍을 3년에 걸쳐 제작한 전병현(69) 조각가는 "전 국민의 관심과 우려 속에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상주본의 온전한 보전을 염원하며 서각병풍을 제작해 상주시에 기증하기로 했다"며 "하루 빨리 상주본이 온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공개되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전 조각가는 지난 7일 상주시에 이 병풍을 기증했다.
 
상주시가 로비에 병풍까지 세우며 상주본의 귀환을 고대하고 있지만 염원이 실현되기는 쉽지 않은 분위기다. 지난달 24일 황천모 상주시장이 상주본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배익기(55)씨를 만나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 10여년째 상주본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법적 공방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달 24일 황천모 경북 상주시장(앞줄 오른쪽)이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배익기씨(앞줄 왼쪽)를 만나 상주본 보존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사진 상주시]

지난달 24일 황천모 경북 상주시장(앞줄 오른쪽)이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배익기씨(앞줄 왼쪽)를 만나 상주본 보존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사진 상주시]

 
상주본의 존재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건 2008년. 고서적 수집가인 배씨가 한 방송국을 통해 상주본을 갖고 있다고 알리면서다. 하지만 골동품 판매업자 조모(2012년 사망)씨가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서면서 기나긴 공방이 시작됐다. 대법원은 2011년 5월 상주본의 소유권이 조씨에게 있다고 판결했지만 배씨는 상주본 인도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구속(2014년 대법원 무혐의 판결)되기도 했다.
 
조씨는 사망하기 전 상주본을 서류상으로 문화재청에 기증했다. 정부는 이를 근거로 상주본의 소유권이 국가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배씨에게 상주본 인도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배씨가 상주본이 어디에 있는지 밝히지 않아 회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문화재청은 상주본의 훼손과 분실 등을 우려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4월 배씨에게 보낸 공문에서 "국가 소유 훈민정음 해례본에 대해 3차례 인도 요청을 했으나 현재까지 반환되지 않고 있다"며 "소중한 문화재가 하루 빨리 국가에 인도되길 바라고 있으며 인도될 때까지 이 문화재가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잘 보관·관리해 주길 간곡히 부탁한다"고 했다.
지난해 4월 27일 경북 상주시 낙동면 그의 사무실에서 만난 배익기씨. 상주=김정석기자

지난해 4월 27일 경북 상주시 낙동면 그의 사무실에서 만난 배익기씨. 상주=김정석기자

 
배씨는 지난해 4월 문화재청이 강제집행으로 상주본을 회수하는 것을 막아달라며 소송을 냈다. 하지만 법원은 올해 2월 "법적 소유권이 배씨에게 있지 않으므로 강제집행을 막아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없다"는 취지로 기각했다. 배씨는 이에 불복해 3월 대구고법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그는 지난해 4월 경북 상주·군위·의성·청송 지역구 국회의원 재선에서 '상주본 국보 1호 지정'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출마했다가 낙선하기도 했다.
 
배씨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상주본은 원래 우리 집에 있던 것이다. 내가 조씨에게서 상주본을 훔친 것이 아니니 애초 소유권이 그에게 있지 않았다"며 "소유권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는 판결부터 다시 따져야 한다. 모든 범죄행위가 밝혀지고 나서 소유권이 정리된 후에 타당한 해결 방법을 따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주=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