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의 시시각각] 신성 독점과 가짜뉴스 판별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인지심리학의 공통된 연구 결과다. 인간의 한정된 주의력으로는 세상 모든 정보를 담을 수 없다. 생명과 안전에 의미 있는 변화만 포착하도록 진화돼 왔다. 그러다 보니 관심 밖 대상에 대한 주의력 부족은 필연이다. 유명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이 좋은 예다. 주의력 결핍만 있는 게 아니다. 기억력도 믿을 게 못 된다. 1963년 케네디 대통령 암살 직후 추모 분위기가 한창일 때 한 여론조사에서 미국 국민 3분의 2가 케네디를 찍었다고 주장했다. 3년 전 선거에서 케네디와 닉슨은 거의 50대 50의 박빙이었다.
 
“논평은 자유다. 그러나 사실은 신성하다.” 영국 가디언지 편집장 찰스 스콧의 말이다. 가짜뉴스 규제 필요성을 들고나온 이낙연 총리가 인용해 새삼 회자된다. 동아일보 출신인 그가 기자 생활 내내 지녔던 좌우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취재 현장에서 사실이 저절로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특히 정치적·이념적인 사안에서는 더욱 그렇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는 것 아닌가, 끊임없이 고민하며 퍼즐을 맞춰 가야 한다. 사실은 신성하다지만, 어디 신성(神性)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던가. 언제나 사제(司祭)의 입을 통해 신탁(神託)이라는 형태로 드러나지 않았나. 신탁은 언제나 입맛대로 해석됐고, 사제는 권력에 오염되기 일쑤였다.
 
가짜뉴스의 경계는 모호하다. 조악한 사실 조작은 오히려 문제 될 소지가 적다. 이낙연 총리의 호찌민 거소 방명록 문구를 김정은 찬양으로 둔갑시킨 가짜뉴스는 그야말로 유치하다. 여기에 속을 국민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 오히려 문제는 각종 ‘설’의 형식을 띤 가짜뉴스다. 단편적 사실을 얼기설기 엮은 뒤 그 빈틈을 무책임한 추론으로 메꾸는 구조다. 생각의 틈을 파고들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한다. ‘합리적 추론’으로 위장하며 책임을 비켜 가지만, 반증 앞에서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는 점에서 합리나 이성과는 거리가 멀다.
 
가령 가짜뉴스 규제론의 본격적 계기가 된 문재인 대통령 건강 이상설을 보자. 설 자체는 허무맹랑하지만 이 설을 얽는 것은 흩어진 사실들이다. ‘외교 석상에서 A4 용지를 보고 읽는다’ ‘방명록에 대한미국이라고 썼다’ ‘지진 피해 여학생들에게 좋은 경험 했다고 말했다’ 등등. 그 팩트에 이념, 희망, 억측, 편견, 악의가 버무려져 가짜 뉴스가 됐다.
 
진보 쪽은 더하면 더했지 다를 바 없다. 세월호 침몰 원인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각종 설들이 단적인 예다. ‘잠수함 충돌설’은 ‘해상교통관제센터(VTS)의 레이더 영상에 이상한 물체가 잡혔다’ ‘선체 옆에 상처가 있다’ ‘핀 안정기가 정상 범위를 벗어나 틀어져 있다’ 같은 ‘사실’로 구성됐다. 세월호가 물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 이들의 주장은 가짜로 판명 났지만, 빈약한 사실들이 뉴스로 바뀌는 구조는 똑같았다. 문제는 이들 진보 쪽 주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스로 반성하는 경우도 없다. ‘뇌 송송 구멍 탁’ ‘정윤회 밀회설’ 등 전 정부를 흔들었던 가짜뉴스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에 대한 문책 없는 규제론이 얼마나 설득력을 갖출지는 의문이다.
 
누구라도 콘텐트를 만들 수 있는 1인 미디어의 특징 중 하나는 사실과 정치적 신념의 손쉬운 결합이다. 이는 가짜뉴스 양산이라는 역기능도 있지만, 민주주의 확대라는 순기능도 있다. 지금까지 순기능만 강조했던 문재인 정부가 갑자기 역기능을 들고나온 이유는 뭔가. 가짜뉴스 규제를 말하기 전 ‘오염된 주장’과 ‘신성한 사실’을 구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부터 따져 볼 일이다. 신의 뜻을 독점하던 고대 신전의 사제가 될 생각이 없다면.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