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자녀 갈등에 호흡기 못 뗀 60대, 사전의향서만 썼어도…

지난 8일 서울 국립중앙의료원 사전연명의료상담센터에서 유경 상담사(사진 위)가 한 할머니가 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확인하고 있다. 작성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등록돼 관리된다. 최승식 기자

지난 8일 서울 국립중앙의료원 사전연명의료상담센터에서 유경 상담사(사진 위)가 한 할머니가 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확인하고 있다. 작성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등록돼 관리된다. 최승식 기자

8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사전연명의료상담센터. 
 
“연명의료 중단은 임종이 다가올 때 불필요한 치료를 받지않는 것을 말하는 거에요.”(유경 상담사)
“예, 그것 하려고 일부러 성남에서 전철 타고 왔죠. 뭘 하면 되나요.”(79세 송인자 할머니)
“이 서류(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사인하면 돼요. 심폐소생술·인공호흡기·혈액투석·항암제 투여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겁니다.”(유경)
“어려운 지경에 닥치면 자식에게 걸림돌이 되기 싫어요. 품위있게 모습으로 맞이하고 싶어요.”(송 할머니)  
 
이날 센터에는 노인 6~7명이 상담에 여념이 없다. 3명의 상담사가 일손이 부족해 일부는 대기했다. 사전의향서와 연명의료 중단 제도를 설명한다. 어르신들은 웰다잉(Well dying) 의지가 강했다.
 
"내 나이가 벌써 90살이 넘었다. 의식이 있을 때 내 삶의 마지막을 미리 결정하고 싶다. 의미없는 고통스러운 처방을 받고 싶은 생각이 없다."(94세 이모씨)
“자식들이 처음엔 놀랐지만 나중엔 결정 잘 했다고 하더라.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다.”(76세 연다희씨)
 
유경 상담사(사회복지사)는 “하루 평균 10명, 많게는 30명의 어르신이 사전의향서를 작성한다. 여기 와서 의향서 작성을 포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장례식장에 조문 온 6명의 할머니가 한꺼번에 작성한 적이 있다. 할머니 사망을 경험한 만 24세 청년이 찾아와서 작성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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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의향서는 2~3월 1만4717명이 작성하더니 8개월만에 5만8845명으로 늘었다. 존엄사의 세 가지 방법 중 사전의향서가 가장 깔끔하다. 본인이 작성해서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등록해 두면 임종 시기에 활용한다. 의사가 사전의향서를 확인하고 집행하면 된다.  
 
연명의료계획서는 의사의 문서다. 의사가 환자에게 연명의료 중단 제도를 충분히 설명하고 환자의 서명을 받는다. 의사가 아직 이런 절차에 익숙하지 않다. 사전의향서든 연명계획서건 이런 걸 통해 환자가 직접 서명하지 않으면 결국 가족에게 부담이 돌아간다. 가족 2명이 "어머니가 연명의료를 원하지 않았다"고 증언하거나, 이도 아니면 가족 전원이 합의해야 한다.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데다 무엇보다 자녀들에게 심적인 부담을 안긴다.
 
60대 폐암 말기 환자는 스스로 호흡을 할 수 없게 되자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목에 관을 넣어 인공호흡기를 달았다. 자녀들은 연명의료를 그만하길 원했다. 하지만 환자의 아내는 '끝까지'를 주장했다. 가족 전원 합의가 안 되는 바람에 한달 넘게 중환자실에서 연명의료를 받고 있다. 
 
산후우울증을 앓던 한 여성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가 뇌사(腦死) 상태에 빠졌다. 인공호흡기를 부착하면서 연명의료가 이어졌다. 남편은 "편하게 보내주자"고 연명의료 중단을 요구했다. 하지만 여성의 어머니가 반대했다. 가족 간 이견 때문에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없었다. 
 
인생의 끝자락 품위 있게 마감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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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의 노인은 갑작스레 말기나 임종 상황에 닥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92세 노인이 방에서 책을 정리하다 낙상해 머리를 다쳤다. 처음에는 이상이 없는 걸로 나왔으나 갑자기 병이 악화했다.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하고 심폐소생술을 했다. 
 
세 명의 환자가 사전의향서를 썼으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 있다. 이게 없으면 가족 간에 이견이 생겨도 조정할 길이 없다. 사전의향서라는 문서가 아니더라도 평소 자녀들에게 "연명의료를 원하지 않는다"고 얘기해 두는 게 차선책이다. 자녀들이 이런 얘기를 넌지시 꺼내 부모의 동의를 받아 둬도 된다.
평소 이런 소신을 밝혀두면 나중에 말기나 임종상황에서 도움이 된다. 가족 2명이 환자의 평소 소신을 추정해서 진술하면 환자의 말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 홍양희 사전의료의향서실천모임 회장은 "연명의료계획서는 의사가 많이 활용하지 않는다. 사전의향서는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다. 건강할 때 미리 써두면 본인 뜻대로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고 무엇보다 자녀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고 말했다. 미리 이런 문제를 얘기하면 가족애가 돈독해진다고 한다. 
 
사전의향서를 확산하려면 암 진단 직후에 병원이 이 제도를 알려주는 게 좋다. 권용진 서울대병원 공공의료사업단장은 "대형병원이 사전의향서 등록기관이 돼서 암 진단 단계에서 사전의향서를 작성하도록 권유하면 매우 효율적일 수 있다"며 "정부가 대형병원이 앞장설 수 있게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성식·이에스더·이승호 기자 sssh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