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전쟁 두려워 인권 탄압 눈 감았더니 나치, 유대인 절멸 시작했다

 11월 9일은 인류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날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차별하고 폭력을 행사하며 박해하는 비극이 시작된 ‘크리스탈나흐트(Kristalnacht)’가 올해 이날로 80주년을 맞았다. 독일어로 ‘수정의 밤’이란 뜻의 이 단어는 영어로 ‘깨진 유리창의 날’로 번역되기도 한다.  
수정의 밤에 파괴된 마그데부르크의 유대인 소유 상점.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수정의 밤에 파괴된 마그데부르크의 유대인 소유 상점.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80년 전 11월 9~10일 독일서 유대인 공격  
11월 9일과 10일 사이의 밤에 독일 전역의 유대인 소유 점포 815개, 주택 171개, 시너고그(유대교 예배당) 193개소가 불타거나 파괴됐다. 나치의 준군사조직인 돌격대(SA)가 주도했는데 상당수 민간인도 동참했다. 유대인 가게 유리창을 밤새 파괴하면서 온 거리에 유리 조각이 크리스털처럼 널린 것을 두고 ‘수정의 밤’으로 표현한다. 유대인들은 러시아어로 반유대주의에 입각한 박해와 학살, 약탈, 폭동을 가리키는 ‘포그롬’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수정의 밤에 파괴된 베를린 시나고그(유대교 예배당)의 내부. [사진 위키피디아]

수정의 밤에 파괴된 베를린 시나고그(유대교 예배당)의 내부. [사진 위키피디아]

 

대중 동원해 특정 집단 억압 나서  
1933년 총선 승리를 통해 집권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유대인 억압을 노골화했는데 급기야 이날 대중까지 폭력을 동원해 본격적으로 유대인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계기 또는 핑계는 단순했다. 프랑스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의 직원이던 에른스트 폼 라트(1909~1938년)가 그해 9월 9일 파리에서 17세 유대계 폴란드인 헤르셸 그린스판(1921~42년 무렵 사망 추정)에게 살해됐다. 그린스판은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자 나치 정권의 유대인 박해에 복수하겠다는 생각으로 독일인 외교관을 해쳤다고 진술했다. 그는 프랑스의 감옥에 갇혀 있다가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뒤 독일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가 42년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  

집단 증오와 폭력으로 얼룩진 국가폭력  
 

결국 ‘수정의 밤’은 유대인의 일탈행동에 대한 감정을 독일의 나치 단체와 민간인들이 유대인 전체에 대한 집단적인 증오와 폭력 행사로 표출한 사건이다. 더욱 가증스러운 일은 ‘수정의 밤’에 대해 나치 정권의 대변인인 요제프 괴벨스(1897~1945년) 선전상이 관영 매체에 “자연발생적인 항위 시위”라고 주장한 것이다. 정부의 관리가 유대인에 대한 불법적인 탄압을 묵인하는 수준을 넘어 숫제 조장한 이 사건은 ‘국가폭력’의 전형이다.  

수정의밤에 청소년들이 유대인 소유 상점을 공격하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수정의밤에 청소년들이 유대인 소유 상점을 공격하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치안조직이 특정집단 혐오 부추겨  
뿐만 아니라 비밀국가경찰(게슈타포)와 일반 경찰을 합친 조직인 치안경찰(SiPo)의 장관이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1904~42년)는 한술 더 떴다. 그는 그날 밤 산하 치안 조직과 소방대 등에 전문을 보내 유대인 상점과 시너고그 습격을 지원하고 부유한 유대인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치안을 맡은 국가조직이 오히려 특정 집단에 대한 공격을 부추겼다.  

 

수정의밤 다음날 함부르크의 유대인 소유 상점 앞을 나치 돌격대원들이 지키고 있다. 들고 있는 피켓에는 유대인 상점 주인이 독일 직원에게 굶어죽을 정도의저임금만 줬다고 니난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수정의밤 다음날 함부르크의 유대인 소유 상점 앞을 나치 돌격대원들이 지키고 있다. 들고 있는 피켓에는 유대인 상점 주인이 독일 직원에게 굶어죽을 정도의저임금만 줬다고 니난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편가르기로 국가가 계급투쟁 선동
생업을 잃은 유대인들이 보험금을 청구했지만, 그 돈은 모두 국가에 몰수당했다. 나치 독일의 경제부 장관이던 발터 푼크(1890~1960년)는 나치 실력자로 전임 경제부 장관이던 헤르만 괴링(1993~1946년) 공군 장관의 압력을 받아 이런 조처를 했다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자백했다. 유대인이 스스로 경영해 이룬 경제 업적을 국가가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몰수한 셈이다. 심지어 함부르크의 한 상점 앞에는 돌격대원들이 “이 가게의 유대인은 독일일 직원에게 굶어 죽을 정도의 임금만 줬다”며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부추겼다. 국가가 나서 계급투쟁을 선동한 셈이다.  

 

나치, 서구가 방치하자 한술 더 떠
이러한 크리스탈나흐트는 특정 집단에 대한 증오나 분노를 용인하거나 당연시하는 권력의 태도가 사회 전체의 광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이런 광기를 방치하면 더 큰 불행으로 이어짐을 역사는 잘 보여준다. 크리스탈나흐트 뒤 영국이나 프랑스 등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격렬한 항의나 압박이 오지 않자 나치 정권은 하이드리히 등이 나서 대대적인 유대인 절멸 계획 마련에 들어갔다. 이른바 ’최후해결‘이라는 이름으로 유대인은 물론 집시,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등에 대한 대대적인 절멸 계획을 마련했다. 나치는 독일은 물론 유럽 전역에 수많은 강제수용소를 설치해 이들에 대한 대량 학살에 들어갔다. 폴란드인과 러시아인, 심지어 고분고분하지 않은 가톨릭 사제와 개신교 목사도 죽음의 수용소로 보냈다. 국제사회가 크리스탈나흐트를 방치하지만 않았으면 나치가 감히 이렇게 대담한 ’인간 도살‘에 나설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이 않을 수 없다.  

 아돌프 히틀러의 요구대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넘기는 내용의 뮌헨협정에 서명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1938년 9월30일 헤스톤 공항으로 귀국한 뒤 마중 나온 군중 앞에서 협정문을 보여주고 있다. 체임벌린은 적의 도발을 반드시 분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유화적으로 평화를 애걸하면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겼다.

아돌프 히틀러의 요구대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넘기는 내용의 뮌헨협정에 서명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1938년 9월30일 헤스톤 공항으로 귀국한 뒤 마중 나온 군중 앞에서 협정문을 보여주고 있다. 체임벌린은 적의 도발을 반드시 분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유화적으로 평화를 애걸하면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겼다.

 

전쟁 피하려 요구 다 들어줘  
또 하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게 크리스탈나흐트가 벌어진 바로 그해 9월 30일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와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뮌헨에서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총리와 함께 체결한 뮌헨협정((Munich Agreement)이다.  히틀러는 ‘최후의 영토적 요구’라며 영국과 프랑스를 압박해 신생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계 거주지인 주데텐란트를 합병했다.  

 
당일로 독일 뮌헨에서 비행기를 타고 런던 서부 헤스턴 공항에 도착한 체임벌린 총리는 몰려온 환영인파 앞에서 환이 웃으며 협정문을 흔들어 보였다. 이날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로 돌아온 체임벌린은 이렇게 말했다. “영국 총리가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믿습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요구대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넘기는 내용의 뮌헨협정에 서명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1938년 9월30일 헤스톤 공항으로 귀국한 뒤 마중 나온 군중 앞에서 협정문을 보여주고 있다. 체임벌린은 적의 도발을 반드시 분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유화적으로 평화를 애걸하면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겼다.

아돌프 히틀러의 요구대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넘기는 내용의 뮌헨협정에 서명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1938년 9월30일 헤스톤 공항으로 귀국한 뒤 마중 나온 군중 앞에서 협정문을 보여주고 있다. 체임벌린은 적의 도발을 반드시 분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유화적으로 평화를 애걸하면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겼다.

유화정책, 허황된 야욕만 키워  
이 장면은 BBC방송을 통해 영국 전역에 중계됐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체임벌린은 다시는 영국과 유럽을 전쟁으로 몰고 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굴욕적인 양보와 신생국의 희생을 포함해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평화를 지키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최후의 영토적 요구”라는 히틀러의 말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을 것이다. 역사는 이를 ‘유화정책(appeasement)’이라고 부른다. 체임벌린은 유화정책에 따라 앞서 1938년 3월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에서 금지한 오스트리아 병합을 강행했을 때도 외교적인 항의만 했을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말만 할 뿐 행동이 따르지 않는 나토(NATO:  No Action, Only Talk) 정책은 영국의 개입을 두려워하며 조마조마하던 히틀러의 간만 키운 셈이 됐다.  

 

유화정책으로 높은 인기에 취한 결과  
당시 영국에서 뮌헨협정과 체임벌린 총리는 인기가 높았다. 영국 국민의 대다수는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켰다”고 생각해 체임벌린의 결정을 환영했다. 귀국한 체임벌린은 총리관저로 가는 화이트홀 대로에서 귀환하는 총리를 맞이하기 위해 도열한 수천 인파를 보며 감회에 젖었을 것이다. 어떤 신문은 그가 다음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방치와 유화의 대가 피로 치러  
1차대전의 참혹한 기억이 생생했을 당시, 체임벌린은 약소국을 희생시켜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보려고 유화정책을 폈고 국민은 이를 지지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히틀러의 야욕만 키워 더 큰 전쟁만 초래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이 이듬해인 1939년 9월 1일 발발한 나치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다. 유화 정책은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과 전 유럽 침공 등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유럽은 방치와 유화의 대가를 피로 치러야 했다.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은 비극 불러  
결국 크리스탈나흐트는 나치 침략의 변곡점이었다. 이 사건은 인류 비극의 시작은 사회적 폭력에 대한 용인이나 조장에서 비롯한다는 교훈도 준다. 현재 이민, 난민, 특정 종교나 인종, 집단에 대한 전 세계적 차별을 우려의 눈으로 봐야 할 이유다. 이민자에 대한 차별을 공공연하게 말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해 전 세계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수정의 밤에 파괴됐다가 제2차 세계대전 뒤 복구된 베를린의 한 시나고그(유대교 예배당) 외벽에 파괴와 복구의 연혁이 적혀 있다. 중간쯤에 대문자로 '결코 잊지말자'라고 적혀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수정의 밤에 파괴됐다가 제2차 세계대전 뒤 복구된 베를린의 한 시나고그(유대교 예배당) 외벽에 파괴와 복구의 연혁이 적혀 있다. 중간쯤에 대문자로 '결코 잊지말자'라고 적혀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북한 인권, 난민 문제 피하지 말아야  
한국 사회에는 이런 시선이 없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그 전에 우선 동아시아에서 국가가 폭력을 방치하는 인권 탄압에 대해서도 잘 살펴야 한다. 특히 북한 인권 문제는 피하지 말고 반드시 따지고 넘어가야 한다. 서로 비극을 미리 막기 위해서다. 인권 탄압을 좌시하면 우리 인권도 무시당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인권 탄압보다 더한 일을 해도 된다는 그릇된 신호를 보낼 수 있다. 크리스탈나흐트 80주년을 맞아 남북, 한중, 한일 관계 모두에서 우리의 대외 정책이 갈 길을 제대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기대에만 취하지 말고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볼 때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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