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복 연애소설> "누구도 날 위로할 수 없어, 필요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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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사진 심상복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제7화

"오~~ 그래요?"
가라앉은 분위기도 바꿀 겸 나는 더 없이 반갑게 반응했다. 왜 여자들 중에는 아빠 닮은 사람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다고 하지 않던가. 어릴 적엔 커서 아빠와 결혼할 거라는 딸도 있고.
 
"아버지가 무척 멋진 분일 거 같아요. 미남에 성격도 좋고, 그렇죠?"
 
"본인 자랑을 그렇게 하는 건가요?"
 
"제가 아니라 남들이 그러죠. 본래 자랑은 남의 입을 빌려서 하는 거라고.... 하하하~~"
 
"아버지는 점잖고 외모도 준수했죠. 이젠 80대 노인에 중환자라 그런 모습을 찾을 수도 없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금세 촉촉이 젖어들었다.
 
"그런데 전 아버지를 싫어해요. 세상에서 제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지만 내 귀에는 파편처럼 꽂혔다. 나는 뭐라 대응할 말을 찾지 못하고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얼굴을 들어 그녀를 보니 영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온순한 양, 그러면서도 불만에 가득찬, 약간은 멍해 보이기까지 했다. 알코올과 아버지에 대한 회상이 빚어내는 복합현상인 것 같았다.
 
"한 병 더 시킬까요?
 
"......."
 
"이게 우리 아빠예요."
그녀는 지갑에서 낡은 사진 한장을 꺼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상당한 취기에도 나와 너무 비슷했다.
 
"어때, 정말 닮았죠? 아버지가 마흔 살 때예요. 김천씨보다 두 살 많은 때...."
 
나는 사진을 몇 번 더 뜯어봤다. 처음 느끼는 이미지가 그랬고, 자세히 이목구비를 비교해 봐도 그랬다.


하필 중식당...
"근데 김천씨, 어떻게 날 데리고 중국집엘 온 거야?"
그녀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반말투로 돌아갔다.
 
"네에? 중국집 싫어하십니까?"
 
10대 시절 중국집을 싫어할 아이는 없을 테지만 너무 자주 갔다고 했다. 아버지는 글 못 쓴다고 마구 혼내고는 동네 중국식당에 데리고 가서 자장면과 탕수육을 시켜주고는 당신은 빼갈(고량주)을 마셨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술 석 잔에 탕수육 한 점씩만 드셨다고 했다. 술은 고3부터 먹기 시작했지만, 술버릇은 그 시절 아버지에게서 배운 거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안주를 별로 먹지 않았다.
 
"술은 어른한테 배우는 거라고 하던데 제대로 배우셨겠네요."
 
"그래? 너도 어디 어른한테 한번 제대로 배워볼래?"
그러면서 나에게 또 한 잔 따라주었다.
 
"8부가 술맛을 가장 좋게 한댔어."
 
중국집에 온 것이 패착이었다. 그녀는 맘에 썩 들지는 않지만 고향의 단골식당 같다고 했다.
나는 술 깨는 약은 물밖에 없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틈틈이 혈중 알코올 농도를 낮추려고 애썼다.
 
"너, 우리가 처음 조우한 날 기억하지?"
 
물론이고 말고다. 나의 여신과 처음 맞닥뜨린 사건이니까. 그제서야 그날 품었던 의문이 풀렸다.
 
나는 그날도 도서관에서 그녀를 훔쳐보고 있었다. 아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보고 나도 신발을 고쳐 신었다. 화장실로 가는 것 같았다. 나도 바로 일어나 그녀 뒤를 따라갔다. 화장실 가는 길은 남녀가 같았기 때문에 의심을 살 일은 없었다. 
 
그때 화장실을 나오던 어르신 한 분이 걸음이 꼬이면서 그녀와 부딪혔다. 작은 손가방이 그녀의 손에서 떨어졌고, 뒤따라가던 나는 멋진 외야수처럼 그걸 낚아챘다. 어르신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이미 몇 걸음 지나간 뒤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에게 파우치를 건넸다.
 
"괜찮으세요?"
 
나를 보는 순간 그녀는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내가 너무 멋있게 손가방을 캐취한 것에 감탄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새 그녀는 이미 화장실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날 그녀는 아버지와 너무 닮은 사람을 봤던 것이다.
 
고량주 네 병을 다 마실 즈음 그녀에 관한 많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마흔네 살이며, 돌싱이었다. 나보다 다섯 살 이상 많기 때문에 반말을 해도 된다고 했다. 다섯 살 안쪽은 친구가 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장유유서에 따라 아래위만 존재한다는 주장이었다. 혹시 불만이면 자기 아버지를 찾아가 따지라고 했다.
 
"네네, 그저 병장님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십시오. 명령만 내리면 세숫물도 떠오고 발도 닦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아직 저는 누나 이름도 모르잖아요. 진짜 이름이 뭐예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메일에서도 숱하게 무명씨, 무명씨 해놓고 이제 와서 이름이 뭐냐고?"
 
"그건 진짜 이름이 아니잖아요?"
 
내가 그녀에게 다섯번 들이댄 끝에 어렵사리 이메일 주소를 받았고, 그 전 네번째 상황이었다.
오후 5시쯤 도서관을 나가는 그녀를 나는 용감하게 따라 붙었다.
 
"이름 좀 물어봐도 될까요?"
 
"혹시 저를 계속 쫓아다니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그냥 관심이 많아서요."
 
"관심 끄세요. 다칠지도 모르니까요."
-다친다고? 이건 또 무슨 말이지....
 
"그래도 이름은 알고 싶습니다."
그녀는 귀찮은 표정으로 돌아서면서 외마디를 흘렸다.
 
"없어요."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가 없다는 거지? 거리의 소음에 잘못 들었나.
나는 발걸음을 빨리해 그녀에게 다가갔다.

 
"뭐가 없다고요?"
 
"이름이 없다고요."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싫다고 하면 될 일인데 이름이 없다는 대답은 정말 뜻밖이었다.
 
"무명씨라고 아시죠? 내가 바로 무명씨예요."
 
말문이 막힌 내 얼굴에 그녀는 폭탄 같은 한마디를 더 던지고 인파 속으로 사려졌다.
나의 두 발은 아스팔트 속에 박힌 듯 움직일 줄 몰랐다. 전혀 통성명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무명이 진짜 이름이라고?


Ms L
내가 그녀를 좋아하게 된 첫째 이유는 외모다. 그것 외 내가 아는 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처음 발견한 이후 몰래 지켜보면서 내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키는 163cm쯤 되고, 책을 좋아하고, 무슨 옷을 입어도 자연스럽고 세련돼 보였다. 청바지든 티셔츠든. 어떤 신발도 그녀를 나이보다 젊게 만들었다. 가방은 그녀가 들면 다 명품처럼 보였다. 나는 혼자 그녀의 별명을 'Ms L'이라고 지어줬다. L은 elegance(우아)란 의미였다.
 
그런 여자가 온갖 곡절을 겪고 살았단다. 그래도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으니 내공은 9단쯤 돼 보였다. 세상은 정말 힘들다고 좀 전에 한 말이 전혀 거짓이 아니었다. 그날 새벽 1시까지 드라마 같은 그녀의 스토리를 들으면서 나는 이 여자가 나의 운명이라고 확신했다. 그녀가 받은 상처와 고통을 나만이 치유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누나를 진심으로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진심입니다. 누나가 더 이상 불행하지 않도록 누나 곁을 지키겠습니다."
 
"야, 김천, 헛소리 말고 술이나 먹어, 인마. 너 아직 애송이야, 애송이. 나 같은 여자에겐 상대조차 안 되는...."
 
그러곤 그녀는 남은 고량주를 맥주컵에 다 부어버렸다.
나는 그 잔을 얼른 내 앞으로 가져왔다.
 
"너 미쳤어? 이걸 마시겠다고?"
 
"마실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잔을 확 뺐더니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누구도 내 곁에 있을 수 없어. 나는 본래 혼자니까."
 
"........"
 
"누구도 날 위로할 수 없어. 위로가 필요하지 않으니까."
 
더 먹다간 사달이 벌어질 판이었다. 나는 그만 가자고 일어섰다. 택시로 집에까지 바래주겠다고 했으나 그녀는 예상대로 사양했다.
 
"병장님이 너무 취해서 안전하게 귀가하는 걸 꼭 확인하고 싶습니다."
 
"어이, 김이병. 너나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늘 수고 많았어."
 
택시에 오른 그녀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도시의 별빛이 되었다. 나는 그녀가 우주선이라도 타고 지구를 떠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떠난 자리를 한참 멍하고 바라보던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린 후 택시를 잡아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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