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고비 셋②2005]정부, 강제동원 7000억 보상···징용 언급도 없었다

 
2004년 11월 10일 오전 노무현 대통령이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 위원들을 청와대로 초청, 오찬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2004년 11월 10일 오전 노무현 대통령이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 위원들을 청와대로 초청, 오찬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2004년 2월 서울행정법원이 한·일 청구권협정 관련 문서 57권 중 5권을 공개하라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일제강제동원 희생자 유족단체가 2002년 9월 정부를 상대로 한·일 협정의 구체적 내용 확인을 요구하면서 시작된 재판이었다.
 
이로써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체결과 70년대 보상 이후 일시적으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일본의 배상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일종의 2라운드다.

 
당시 정부는 양국 관계에 미칠 파장을 근거로 항소했다. 하지만 2004년 8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협의해 문서 공개를 검토하라고 전격 지시하면서 항소를 포기하고 공개가 확정됐다.
 
2005년 1월 청구권협정 관련 문서가 공개되자 일본으로부터 받은 보상금에 비해 1975년 정부가 지급한 피해자 보상액이 터무니없이 적다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박정희 정부는 1975~1977년 보상 당시 3억 달러 중 90%를 경제개발 등에 투입했고 10%만 보상금으로 지급했다. 103만명으로 추산되는 강제 동원 피해자 중 단 8552명만이 혜택을 받았다. 
 
이해찬 국무총리가 2006년 3월 8일 서울 정부중앙청사에서 열린 일제강제동원희생자 지원대책 민관공동위원회 회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해찬 국무총리가 2006년 3월 8일 서울 정부중앙청사에서 열린 일제강제동원희생자 지원대책 민관공동위원회 회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에 따라 노무현 정부는 이에 대한 후속 조치를 준비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과 이해찬 국무총리는 ①법적 보상보다는 다른 형태의 지원이 바람직 ②지원 규모는 국민적 타협·협의 과정을 거칠 것 ③국가가 감당할 수준의 보상 지원을 할 것 ④국회에서 관련 특별법을 제정 등 4가지 기준을 마련했다. 이를 위해 조직된 기구가 민·관 공동위원회다. 양삼승 법무법인 화우 고문 등 민간위원 10명과 이해찬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관계자 11명 등 총 21명으로 구성됐다. 

 
민·관 공동위원회는 2005년 8월 26일 다음과 같은 논의 결과를 정리해 발표했다.
 
①일본군 위안부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와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자는 한·일 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음
 
②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차관 3억 달러에는 개인재산권(보험, 예금 등), 조선총독부의 대일채권 등 한국 정부가 국가로서 갖는 청구권,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반영됨  
 
③한국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수령한 무상자금 중 상당 금액을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제에 사용하여야 할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판단됨 (한국 정부는 1961년 6차 회담에서 일본에 요구한 총 12억 2000만 달러 중 강제동원 피해보상에 대해 3억 6천만 달러를 산정했음)
 
④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에 대해 법적 책임 인정 등 지속적인 책임 추궁을 하는 한편, 국제기구를 통해서 계속 제기
 
일제 피해에 대한 신고 접수가 2005년 2월 1일 시작됐다. 서울 종로구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를 찾은 한 유가족이 일본군으로 징병됐다가 전사한 부친의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중앙포토]

일제 피해에 대한 신고 접수가 2005년 2월 1일 시작됐다. 서울 종로구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를 찾은 한 유가족이 일본군으로 징병됐다가 전사한 부친의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중앙포토]

당시 쟁점은 보상 규모와 방식

오균 당시 국무총리실 한일수교문서공개대책기획부단장은 “당시 민·관 공동위원회는 1965년 청구권협정에 대해선 이전 정부의 관점과 달라진 것이 없다”며 “다만 당시 논의의 최대 쟁점은 이전 정부에서 부족했던 보상을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지, 또한 어느 정도의 예산을 마련하고 이에 대해 국민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등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일제 강제동원에 대해 추가 보상하면 6·25 전쟁이나 월남전 고엽제 피해자 등도 정부의 추가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렇게 될 경우 정부의 과거사 보상액이 천문학적으로 높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당시엔 이해찬 총리뿐 아니라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도 차관회의 등에 참석했다. 오균  부단장은 “이들은 특정 의견을 내기보다는 대체로 경청하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민·관 공동위원회는 2006년 3월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에게는 2000만원, 강제 동원 기간에 다치거나 현재 생존하고 있는 피해자 및 유족에게는 1000만~2000만원의 위로금이 지급됐다. 또한 생존한 피해자에 대해서는 의료비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약 7000억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일제 피해에 대한 신고 접수가 2005년 2월 1일 시작됐다. 서울 종로구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를 찾은 한 사람이 접수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일제 피해에 대한 신고 접수가 2005년 2월 1일 시작됐다. 서울 종로구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를 찾은 한 사람이 접수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청구권 미해결은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자로 규정

하지만 한·일 청구권협정에서 미해결된 대상으로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자 등 3가지 유형으로 한정한 것은 현재 논란 중인 강제동원 배상 논란의 불씨가 됐다. ‘(3가지를 제외하면) 한국 정부가 국가로서 갖는 청구권,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반영됐다’고 한 부분이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당시 언론에선 징용 문제에 대한 청구권은 마무리된 것으로 간주하는 해석 기사가 나왔고, 정부에서도 딱히 이를 반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양삼승 당시 민·관공동위원장은 “외교문서를 갖고 국가 간 조약과 약속을 해석하는 일이었다. 그런 자세로써 합리적으로 접근했을 때 1965년 협정 당시 강제동원의 사적 청구권까지 해결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 지배적인 생각이었다”며 “이견이나 논쟁은 별로 없었다. 이것은 개인 간 민사 재판을 넘어 국가 간 외교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훨씬 폭넓은 사고를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2009년 징용 피해자의 가족이 정부를 상대로 낸 행정소송에서 외교통상부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공탁금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체결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받은 3억 달러에 포함돼 있다고 보아야 하므로 일본 정부에 대해 청구권을 행사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받아야 할 보상금을 국가가 일본으로부터 대신 받았다는 의미다. 
 
2004년 11월 10일 오전 노무현 대통령이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 위원들을 청와대로 초청, 오찬에 앞서 문재인 민정수석과 한덕수 국무조정실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2004년 11월 10일 오전 노무현 대통령이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 위원들을 청와대로 초청, 오찬에 앞서 문재인 민정수석과 한덕수 국무조정실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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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 “현실과 실리를 고려한 정치적 결정”

학계에선 당시 노무현 정부가 실리와 현실을 고려한 정치적 결정을 내린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이원덕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는 “당시엔 강제동원 피해자가 일본 법원에 소송을 걸고 계속 패소하던 상황”이라며 “당시 정부는 일본 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민간 차원의 청구권 승소가 어렵다고 봤다. 그런 틀에서 보상 작업에 착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따라서 피해자들이 한국 법원을 통해 승소를 거두고 일본기업 재산 압류를 시도하는 것은 당시 노무현 정부의 구상과는 어긋난 전개인 셈”이라고 말했다.
 
당시 민·관 공동위원회 작업에 참여한 한 전직 외교관도 “피해자가 한국 법원에 제소해 배상금을 받아낸다는 것은 당시로선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이라며 “일본 법원이 아닌 한국 법원의 판결을 내세우면 결국 국가 대 국가의 갈등으로 비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본의 대법원인 최고재판소. [연합뉴스]

일본의 대법원인 최고재판소. [연합뉴스]

그럼에도 명시적으로 개인 청구권이 반영됐다고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오균 당시 부단장은 “과거와 달리 국제법에서 개인 인권이나 청구권을 폭넓게 인정하는 분위기가 마련됐고, 이미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법원에 제소했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그것을 막는 근거를 마련할 필요는 없었다”며 배경을 설명했다.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하고 있는데, 굳이 막을 이유가 없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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