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딥톡] "다녀오면 집 한채 생긴다? 아토피만 걸려" 엘리트 꽃길, 주재원의 몰락

66만6163개. 국내에 있는 기업체 수(2017년 기준)입니다. 국민의 대다수가 회사에서 일하는 직장인인 셈입니다.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기 전까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요. 중앙일보의 새 디지털 시리즈인 [기업 딥톡(Deep Talk)]에선 대한민국 기업의 변화, 그리고 그 속에서 일하는 직장인의 꿈ㆍ희망ㆍ생활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지난달 31일 신종 코로나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한 중국 우한시에 고립돼 있던 우리 국민들이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해 전세기에서 내리고 있다. 이 중엔 중국 현지 주재원도 상당수가 포함됐다. [뉴스1]

지난달 31일 신종 코로나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한 중국 우한시에 고립돼 있던 우리 국민들이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해 전세기에서 내리고 있다. 이 중엔 중국 현지 주재원도 상당수가 포함됐다. [뉴스1]

 
# 국내 5대 대기업의 중국 주재원인 A 씨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2년 째 가족과 떨어져 기러기 생활 중인 그는 중국 베이징 근교 공업지구에서 공장 가동을 담당하고 있다. A 씨는 “처음엔 온 가족이 왔지만 온종일 공기 청정기를 돌려도 (공기 질 ‘나쁨’ 수준인) 빨간색이다. 아이가 아토피가 생겨 고생을 하다 견디다 못해 아내와 아이는 한국으로 보냈다”고 말했다. 그는 "신종 코로나 감염증(코로나 19)은 몇 달 있으면 가라앉을 테지만 공기질은 나아지지 않는다"며 “(연봉을) 한국에서보다 1.3배 정도 더 받고 있지만 괜히 왔다 싶다. 빨리 후임자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직장 생활의 꽃, 승진의 지름길로 불렸던 해외 주재원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주재원은 여전히 경력과 고과를 갖춘 ‘엘리트’들을 위한 자리다. 하지만 직원들의 선호도는 과거에 비해 크게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근무 지역과 처우, 가치관의 변화 등이 공통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선진국은 만석…중국·남미 증가

한국 기업들은 1970~80년대 무역상사를 중심으로 당시 최대 시장이었던 미국과 유럽에 속속 진출했다. 그 결과 선진국들엔 해외 네트워크가 구축돼 새로 갈 자리가 많지 않고, 새로운 시장인 중국·동남아시아·인도·중동·중남미·아프리카 지역 중심으로 주재원 수요가 늘고 있다. 기아차만 해도 2013년에 멕시코 근무 직원은 한명도 없었지만 2018년엔 2400명이 넘는 직원(현지인 포함)이 일하고 있다. 반면 미국 근무 직원은 3177명에서 2996명으로 다소 줄었다. 같은 기간 현대차 중국 직원은 1만5631명에서 1만8132명으로, 인도 직원은 8893명에서 9323명으로 늘었다.  
 
문제는 주재원 임기가 통상 3~5년인 만큼 부임지가 삶의 질과 직결된다는 점이다. 정보기술(IT) 회사에 다니는 B씨는 브라질 주재원으로 선발됐지만 결국 포기했다. “편견을 갖는 건 나쁘지만, 가족들 치안이 걱정되더라고요. 게다가 브라질은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데 아이 언어 교육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고사했어요.”
지난해엔 한국 대기업의 주재원들이 현지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크게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진은 주재원 피습 사건이 벌어진 터키법인 소재지역. [연합뉴스]

지난해엔 한국 대기업의 주재원들이 현지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크게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진은 주재원 피습 사건이 벌어진 터키법인 소재지역. [연합뉴스]

험지일수록 ‘오지 수당’이 높지만, 지급 기준이 까다로워졌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지역을 4개 급지로 나눠 수당을 주는데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이런 곳은 오지 축에도 못 든다”며 “나이지리아, 파키스탄, 이라크 정도는 돼야 (가장 열악한) 1급지로 인정된다”고 말했다. 요즘처럼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이 돌 때면 한국 본사의 동료들조차 ‘후진국 사람’ 취급을 하는 것 같아 마음 고생까지 덤이다.  
   

한국산 먹거리 사느라 생활비 더 들어 

과거엔 ‘다녀오면 집 한 채가 생긴다’고 할 정도로 주재원의 경제적인 혜택이 풍부했다. 대기업의 경우 한국 연봉에 주거를 비롯한 각종 수당, 배우자 어학 교육과 자녀 교육비, 차량과 유류비, 문화 생활비까지 지원하는 곳들이 많았다.
 
하지만 최근엔 수당 항목과 금액이 전반적으로 줄었다. 중국 상하이 주재원인 C씨는 “상하이 물가가 너무 올라 회사에서 주는 주택 자금으로는 턱도 없고 차로 회사에서 1시간 30분을 달려야 하는 외곽에 집을 얻었다”고 했다. 이어 “먹거리가 불안해 한국산 위주로 사는데 1.5~2배가 비싸다. 아이들 국제학교도 좋은 곳은 중국 부자들이 (학비를) 너무 올려놨다. 요즘 같아선 장점이 없는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미국과 영국, 캐나다 등 영어권 국가 주재원의 국제학교 학비 지원을 크게 줄인 기업들도 많다.
 

외국 나갔더니 ‘잊혔다?’ 

‘승진 보장’도 옛말이다. 국내 대기업 인사 담당 부서의 한 관계자는 “주재원 경력이 승진 심사에 긍정적인 것은 맞지만 정해진 가산점이나 진급 특혜는 없다”고 설명했다. 전자관련 대기업 차장은 “(직장에서) 눈에 보여야 한다. 4~5년 자리를 비웠다가 (승진) 경쟁에서 도태돼 임원의 꿈을 접고 현지 채용직으로 전환하는 경우를 여럿 봤다”고 말했다. 
 
직장인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해외 주재원에 대한 글. [화면 캡처]

직장인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해외 주재원에 대한 글. [화면 캡처]

여기에 현지 법인의 실적이 악화할 경우 주재원 경력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중국 정부의 불공정한 시장 운영과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보복으로 철수한 롯데의 유통사업이 대표적이다. 중국 사업을 접으면서 롯데마트의 해외 주재원은 2015년 56명에서 2월 현재 9명으로, 롯데백화점은 52명에서 11명으로 줄었다. 중국에서 근무했던 롯데쇼핑 관계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시장에서 성공해 요직으로 가보겠다는 꿈을 안고 고생했는데, (사업 철수로) 오히려 능력을 평가절하당한 것 같다”며 씁쓸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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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직장도 문제, 입시도 애매 

달라진 가치관도 한몫 한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지난 1월 5915명을 대상으로 ‘성공적인 삶이 무엇인지’ 물어보니 1970~80년대생은 ‘안정적인 수입으로 가족과 화목하게 사는 삶’, 1990~2000년대생은 ‘좋아하는 일, 취미를 즐기면서 사는 삶’이라는 답이 1위를 차지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갖고 그 분야에서 인정받는 삶’(34%)이라고 답한 60년대생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LG 계열사의 한 50대 임원은 “우리 때는 비전 하나만 보고도 나갔지만, 요즘은 '승진도 확실하지 않고 수입도 별로 득이 없는데 우리가 왜 고생하느냐'고 한다. 국내에 있으면 주 40시간에 연·월차 충분히 쓰면서 해외여행도 자주 가는데 주재원 매력이 크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맞벌이 부부와 만혼 증가 추세도 의외로 영향이 크다. SK의 한 직원은 “남편이 주재원으로 발령 나면 내 커리어를 포기해야 한다. 휴직으로 인정도 안되니 그대로 경단녀(경력단절 여성)가 된다. 얻는 것에 비해 기회 손실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대학 입시의 재외국민 특별전형 자격은 ‘주재원의 가장 큰 혜택’으로 꼽혀왔다. 대부분의 대학이 ‘고1 포함 ○년 이상 거주’를 조건을 내걸고 있다. 그런데 만혼이 늘며 주재원 대상자가 많은 차장 중·후반급 중엔 자녀가 어린 경우가 많아졌다. 주재원 후보자들 사이에서 “아이가 애매한 사춘기때 가면 입시 혜택도 못 받고 학업도 뒤처져 현지에서 대학을 가야 하고, 기러기 신세에 외국인 사위·며느리까지 본다”는 경고(?)가 나오는 배경이다. 
 
CJ그룹 관계자는 “최근엔 현지 시장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인력을 현지 채용하는 것이 대세”라며 “주재원은 관리직 등으로 최소화하고 있어 전반적인 규모는 축소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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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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