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가해자들이 쓰던 용어"…여당이 가져온 '피해 호소인'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김태년 원내대표가 1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천·강원 예산정책협의회에서 얼굴을 만지고 있다. [뉴스1]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김태년 원내대표가 1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천·강원 예산정책협의회에서 얼굴을 만지고 있다. [뉴스1]

 
피해 호소인께서 겪으시는 고통에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민주당 대표로서 다시 한번 통절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5일 오전 최고위 회의에서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과 관련해 처음으로 직접 사과를 하며 한 말이다. 이 대표는 대변인을 통해 전했던 지난 13일 사과 메시지와 마찬가지로 이날도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이라고 지칭했다. 이 대표는 “민주당은 ‘피해자 중심주의’를 견고하게 지켜왔다”고 강조하면서도 바로 이어 “피해 호소인의 뜻 따라 서울시는 사건 경위를 철저하게 밝혀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남인순 최고위원도 “피해 호소인께 진심으로 송구하다”고 했다. 전날 민주당 여성 의원들은 성명서에 “피해 호소 여성에게 깊은 위로를 전한다”며 ‘피해 호소 여성’이란 용어를 썼다. 
 
민주당은 박 전 시장 관련 의혹에는 유독 ‘피해자’란 단어를 쓰지 않고 있다.
 
이는 과거와 다르다는 평가다. 민주당은 최근 굵직한 성폭행·성추행 사건에서 ‘피해자’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2018년 3월 5일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미투 주장이 나왔을 때 추미애 당시 당 대표는 “당대표로서 피해자께 사과 말씀드린다”고 했다. 지난 4월 20일 오거돈 전 부산시장 사태 발생 후 이해찬 대표도 “피해자께 당 대표로서 사과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2018년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 성추행 의혹을 폭로했을 때는 민주당 여성의원 9명이 기자회견을 열고 “피해자에게 2차 피해 가지 않도록 철저히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박 전 시장 사건에만 용어가 달라진 까닭은 무엇일까. 민주당은 그 이유를 ‘가해자의 부재’ 때문으로 설명한다. 허윤정 민주당 대변인은 “수사가 종결됐기 때문에 고소인이라고 쓸 수가 없으며, 법적 자기방어 할 가해자가 없기 때문에 ‘피해 호소인’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과거 가해자가 존재할 때도 ‘피해 호소인’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다. 2018년 6·13 지방선거 공천을 앞두고 후보자에 대한 미투 제보가 곳곳에서 들어올 때다. 박범계 당시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무안군수 후보자 공천을 취소하며 “당 젠더폭력대책위원회는 피해 호소인을 면담했다. 보고에 근거해 공천을 취소했다”고 말했다. 반면 당 윤리심판원은 미투 의혹이 제기된 충주시장 예비후보를 공천을 배제하지 않기로 하면서는 “피해 호소인에 2차 가해 행위가 확인되면 처벌할 것”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최근에는 지난 1월 남인순 최고위원이 영입 인재 원종건 씨의 미투 주장이 제기되자 “피해 호소인의 용기를 지지한다”고 했다.
 
진중권 전 동양대 페이스북.

진중권 전 동양대 페이스북.

 
결국 “특별히 입장이 있어서가 아니라 혼용해서 쓰는 것”(송갑석 대변인)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피해자를 굳이 ‘피해 호소인’으로 지칭하는 데에는 정치적 의도가 녹아있다는 게 학계의 평가다. 익명을 요청한 여성학 교수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피해 호소인은 연예계, 문화계에서 미투가 시작되면서 나왔던 용어로 가해자 측에서 주로 사용했던 단어”라며 “용어 선택은 그 자체로 ‘규정짓기’를 의미하기에 정치권에서 한 목소리로 나온다는 것은 의도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페이스북에 “피해자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의 뜻을 담고 있다”며 “사건을 프레이밍 하기 위한 새로운 네이밍으로 민주당 인사들이 조직적으로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게 우연의 일치일 리는 없다”고 썼다.
 
김은혜 미래통합당 의원은 이날 논평을 통해 “피해자를 피해자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당”이라며 “희한한 말을 만들어 가해의 돌림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유의동 통합당 의원도 이날 라디오에서 “혐의사실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며 2차 가해를 조장하는 일”이라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의원과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15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창립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악수하고 있다.[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의원과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15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창립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악수하고 있다.[연합뉴스]

  
한편 민주당 당권 주자들은 ‘피해 호소인’이 아닌 다른 표현을 선택했다. 이낙연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피해 고소인께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고, 김부겸 전 의원은 “고소인에 대한 2차 가해는 안 된다”고 적었다.  
 
박해리 기자 park.hae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