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의 시시각각] ‘그럴 리 없는 사람’의 비극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1988년에 발표된 가요 ‘가시나무’는 사실 신앙 고백의 노래다. 지금은 목사가 된 작사·작곡가 하덕규는 “신 앞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죄를 말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조성모가 리메이크하면서 뮤직비디오에 야쿠자 이야기를 펼쳐놓는 바람에 이미지가 달라지긴 했지만.
 
“그럴 분이 아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피해자의 호소는 서울시 내부의 이 한마디에 묻혔다. 고립무원의 피해자는 4년을 시달리다 마지막 방법으로 고소를 택했고, 박 전 시장은 죽음을 택했다. 인간은 자기분열적 존재다. 인간은 내면의 모순을 사회적 역할, 페르소나(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썼던 가면에서 유래한 단어다) 뒤에 감춘다. 자기 분열과 모순에 지친 자아가 쉬는 곳이 프라이버시다. 사적 공간에 공적인 권력관계를 침투시켜 버린 것이 박 전 시장 비극의 시작이다. 박 전 시장 주변 사람들이 인간의 내면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막았을 비극이다.
 
기존 신념 체계에 반하는 새로운 정보가 나타나면 인간은 불편해진다. 인지 부조화 때문이다. 이런 불편함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여권의 태도는 완강했다. ‘맑은 분’ ‘그분의 뜻을 기억하겠습니다’ 같은 반응들이다. 당 차원의 대응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여당 대표는 ‘XX자식’이라는 욕설로 대응했다. 친여 성향의 한 여자 검사는 박 시장과 팔짱 낀 사진을 SNS에 올리고 “나도 성추행했다”고 피해자를 조롱했다. 한 방송 진행자는 “여자가 추행이라고 주장하면 다 추행이 되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모두 ‘그분이 그럴 리 없다’는 믿음의 표출이다.
 
그나마 진보 진영 내 지식인 그룹은 고민한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박 전 시장 추모글 말미에 당혹감을 고백했다. “인권변호사로서의 모습과 그와 상반되는 또 다른 모습이 한 인간에게 공존한다는 모순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그의 죽음을 보면서 내가 늘 ‘죽일 놈과 좋은 사람’이라는 이분법적인 인식 틀에서 세상과 사람을 보아 온 것이 아닌가 하는 반문을 했다.” 하지만 여권의 보편적 정서는 ‘피해자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인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피해 호소인’이라는 기상천외한 단어가 나올 리 없다.
 
각종 추문에 대응하는 여권의 방어 기제에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는 논리가 어김없이 작동했다. 조국 때도, 윤미향 때도, 안희정·오거돈의 성추행 사건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2018년 청와대 특감반의 민간인 사찰 의혹이 터지자 당시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문재인 정부에는 그런 DNA가 없다”고 말했다. 오만한 권력의 우생학이다. 나치 시대 인종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얼마나 엄청난 반(反)인간적 폭력이 자행됐던가. 지금 박 전 시장 사건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2차 폭력이 ‘우리가 그럴 리 없다’는 권력 우생학의 산물은 아닌가.
 
현실과 유리된 ‘무균실의 인간’은 있을 수 없다. 불가피하게 티끌을 묻힐 수밖에 없다. 가령, 일제강점기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백선엽이 없었다면 6·25 영웅 백선엽도 없다.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모순과 복합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강퍅한 독선이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권력이 스스로를 경계할 수 있겠는가.
 
여권 내 잇따른 성 추문을 진보 진영 문화에서 찾으려는 시도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독 ‘순결한 DNA’를 자부해 온 세력이기에 배신감은 더 크다. 모든 것을 진영 논리로 환원시키는 대응 방식에서는 좌절감마저 느낀다.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성장은 내면의 자기 분열을 적절하게 통제·관리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죽일 놈과 좋은 사람’이라는 극단적 양분법은 정신병 아니면 미성숙의 징표다. 사람이 먼저라는 정부 아닌가. 사람에 대한 연구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