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웅변의 시대를 떠나보내며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한때 동네 학원가에서 빠지지 않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것은 웅변학원의 간판들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국민학교로 불리지 않는 초등학교들은 웅변대회를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열었고, 선발된 어린 연사들은 나름의 주장들을 굵게 부풀린 목소리에 실어 “이 연사 힘차게 외칩니다”를 연발하곤 하였다. 초등학생들이 주장한 내용은 아마도 불조심에서 남북통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이었지만, 그 내용과는 무관하게 어떤 경우이건 훼손된 대의(大義)에 비분강개하는 형식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물론 초등학생들의 웅변대회는 성인들의 정치적 삶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대학생 김영삼은 웅변대회에서 외무부장관상을 받았고 나중에 대통령이 되었으며, 김대중 후보는 백만의 인파가 모인 어느 천변에서 사자후(獅子吼)를 토했다고 전해진다. 실로 영웅들의 시대였고 그 시대에 진정으로 걸맞은 장르는 글자 그대로 영웅의 논변인 웅변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 누구도 웅변학원에 다니지 않고, 그 어느 정치인도 몇몇을 제외하고는 웅혼한 목소리를 애써 짓지 않는다. 수천~수만 명을 동원하는 대중연설은 흑백사진이 되었고, 기껏해야 점보트론을 배경으로 율동하는 몇 명의 선거운동원들을 위한 것이 되었다. 이제는 그 누구도 웅변이란 말조차 쓰지 않는다. 웅변의 시대는 떠나간 것이다.
 
웅변의 시대가 저문 것은 물론 우연은 아니다. 굳이 대중연설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방송은 말하는 자들의 목소리와 표정을 전파에 실어 보낼 것이며, 짧고 굵은 SNS 메시지가 유권자들의 핸드폰으로 직접 배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웅변의 시대가 끝나가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정치적 삶의 양식이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웅변의 한 본질이 청중들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끊임없는 대의(大義)로의 환원이고, 민주주의에 대한 처절한 사랑이었으며, 마케도니아의 확장에 저항하는 데모스테네스의 연설 같은 것이었다면, 우리의 정치적 삶과 필요는 그곳에서 이미 너무 멀리 떠나와 있기 때문이다.
 
웅변이 끊임없이 모든 것을 대의로 환원한다는 말의 의미는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웅변은 현실의 모든 문제들을 야기하는 악의 기원을 찾아내고 공동체의 적들이 누구인지를 밝히며 동지들을 규합한다. 그리고 그 방식은 예외 없이 큰 목소리와 현란한 수사로 대중들의 마음과 몸을 격동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치 카이사르의 유해를 앞에 놓고서 생사를 건 역전과 재역전을 거듭했던 부루투스와 안토니우스처럼 웅변과 웅변이 대결하는 곳은 정치공동체의 운명이, 혁명과 반역이, 그리고 삶과 죽음이 흑백처럼 부딪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승자와 패자가 뚜렷하게 갈라지는 웅변이란 게임에서 어떤 중간지점의 목소리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개인의 고통과 고뇌를 깊이 살필 시간 또한 없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정치는 로마시대의 영웅 서사로부터 얼마나 떠나 있는가. 형식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웅변으로 말하는 정치적 토론이 도처에서 오가는 것을 본다. 부풀린 목소리와 현란한 수사가 사라진 대신, 단숨에 악의 근원을 상대방에게서 발견하고 단문(短文)의 모욕을 주고받는 것은 우리 정치적 논쟁의 일상이 되었다. 웅변의 격전지를 지나온 우리는, 여전히 모든 문제를 정치체제의 문제로 환원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적 논쟁은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할 것이다. 매번 우리가 사는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인지 아닌지를 근본적으로 되물어보는 끊임없는 재귀의 과정, 매번 우리의 정치지도자가 가면을 쓰고 있는지를 불길하게 의심해야 하는 반복의 과정들이 웅변의 주제가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질문들로 채워지고 토론될 수 있으면 한다.
 
복잡한 규정과 이해관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개개인들의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길을 찾아내는 것, 구체적인 생활의 이슈들에 대한 디테일한 문제를 발견하고 고치는 것, 개인의 고통을 같이 느끼고 치유해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나지막하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설득하는 것. 이런 정치적 토론을 수행하는 일을 웅변이라는 지나간 시대의 양식에 맡길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웅변의 시대가 저물어 가는 마지막을 목도하고 있다. 기나긴 시대의 마지막을 불태우며 하나의 거대한 제(祭)를 지내듯 우리는 광화문과 종로를 촛불로 채우기도 하였으나, 이제 어둠이 걷히고 촛불이 스러진 후 주변을 둘러보니, 결국 우리는 하나가 아니라 서로 다른 마음과 서로 다른 뜻으로 여기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정규직과 계약직이, 최저임금자와 편의점주가 잠깐 한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더 이상 텅 빈 웅변으로 이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정치의 비극이라는 것은 갈등을 머금은 존재들이 불편하게 공존해야 한다는 사실이지만, 정치의 희망이라는 것은 그 공존의 영역을 누군가 찾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제 핵심적인 질문은 웅변의 시대 이후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 아닌가 한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