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성폭력 매뉴얼 굴욕···"정작 박원순 의혹땐 어겼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 사건과 인천 수돗물 유충 사태에는 공통점이 있다. 과거에 유사사건이 있었고, 재발 방지대책을 내놓았음에도 다시 문제가 생겼다는 점이다.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최고 수준으로 평가된 서울시의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은 정작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작동하지 않았다.
 
 인천시는 지난해 ‘붉은 수돗물 사태’ 이후 숱한 수돗물 관련 위원회를 만들었지만, 또다시 유충 사건이 터졌다. 더구나 1년 만에 유충이 다시 나온 곳은 지난해 문제가 된 정수장이었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내놓는 재발 방지책이 ‘면피용’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인천시 대책, 보여주기식ㆍ사건무마용 의문"

박남춘 인천시장이 지난해 6월 17일 오전 인천시 남동구 인천시청에서 열린 '붉은 수돗물 피해 관련 조치·경과보고 기자회견'에서 피해 주민들에게 사과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남춘 인천시장이 지난해 6월 17일 오전 인천시 남동구 인천시청에서 열린 '붉은 수돗물 피해 관련 조치·경과보고 기자회견'에서 피해 주민들에게 사과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는 ‘인천 수돗물 유충 사고 원인 규명과 고도정수처리시설 진단 긴급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시민단체인 ‘수돗물시민네트워크’의 백명수 정책위원장은 “지난해 인천시가 마련한 대책은 보여주기식, 사건 무마용이 아니었느냐는 질문까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지난해 붉은 수돗물 사태로 매우 많은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질 못했다”고 비난했다. 백 위원장의 지적에는 어떤 배경이 있을까.
 

매뉴얼, “사건 터질 때마다 식물상태”

 인천시는 붉은 수돗물 사태가 발생한 지 약 2개월 후인 지난해 7월, 상수도 행정 전반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상수도 혁신위원회’를 출범했다. 혁신위는 대학교수, 수돗물 관련 연구기관의 연구원, 시민단체 활동가, 주민대표 등 22명으로 구성됐다. 혁신위는 지난해 12월 활동을 마치며 ‘인천 건강한 수돗물 만들기 위원회’를 만들기로 하고 운영조례안을 인천시의회에 제출했다.
 
 수돗물 안전도를 검증하기 위해 여러 위원회의 출범도 추진했다. 약 150명 규모의 수돗물 시민평가단과 및 대학생 서포터즈를 신설하고 기존 수돗물평가위원회 인력과 기능을 확대하는 등 조치도 약속했다. 수도사업소별로 수질안전팀을 신설, 올해 7월부터는 ‘인천 워터케어 서비스’도 운영키로 했다. 옥내급수시설과 배·급수 계통의 수질을 관리하고 검사하는 등 각 건물 단위의 수돗물 관리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정작 이런 노력은 수돗물 유충 사태를 직면하자 아무런 역할을 못했다. 백명수 위원장은 “건강한 수돗물 만들기 위원회는 아직 출범조차 하지 못 했고, 지난해 열심히 활동했던 혁신위도 재소집 되지 않았다”며 “경험·노하우·인력을 갖춘 혁신위를 한번 소집하지 않은 건 낭비”라고 지적했다. 그는 “수돗물 시민평가단 역시 유충이 나왔을 때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며 “인천시가 평가단 홍보만 할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운영을 하겠다는 대책은 없다”고 꼬집었다. 붉은 수돗물 사태 당시 사실상 역할을 못 했던 수돗물평가위원회가 이번에도 존재감을 나타내지 못한 점도 지적됐다.
 

‘모범적’이라던 서울시 성희롱 매뉴얼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영결식이 열린 지난달 13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 고인의 운구차량이 도착하고 있다. 서울시.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영결식이 열린 지난달 13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 고인의 운구차량이 도착하고 있다. 서울시.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는 서울시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시는 2018년 성희롱·성폭력 및 2차 피해 예방대책에 이어 지난해에는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을 내놓고 이를 홍보해왔다. 올해만 해도 2차 가해로 규정되는 행위를 기존보다 확대하는 등 매뉴얼을 재차 강화했다. 2차 가해의 주체도 관리자·행위자·동료로 나누고 적용 사례를 20개까지 세분화했다.
 
 그러나 “촘촘한 매뉴얼을 일부 서울시 관계자가 정면으로 어겼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제기됐다. 박 전 시장 사태가 불거진 7월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A씨를 지원하는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단체는 “서울시 전·현직 고위 공무원과 비서관 등이 피해자에게 연락해 ‘여성단체에 휩쓸리지 말라’, ‘기자회견은 아닌 것 같다’,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힘들 것’이라며 피해자를 회유·압박했다”고 주장했다. 모두 서울시가 매뉴얼에 명시한 2차 가해에 해당하는 행위다. 무엇보다 A씨가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한 근무 기간(2015년 7월~2019년 7월)은 서울시가 매뉴얼을 차츰 강화해온 기간과 겹친다. 사실상 매뉴얼 제작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소리다.
 

매뉴얼 어긴 서울시…“변화도 없다” 지적

황인식 서울시대변인이 지난달 15일 오전 시청 브리핑룸에서 직원 인권침해 진상 규명에 대한 서울시 입장발표를 하기 전 마스크를 벗고 있다. 뉴스1.

황인식 서울시대변인이 지난달 15일 오전 시청 브리핑룸에서 직원 인권침해 진상 규명에 대한 서울시 입장발표를 하기 전 마스크를 벗고 있다. 뉴스1.

 
 “형식적인 조치가 아무런 효력을 거두지 못했다”는 지적에도 서울시는 여전히 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지난달 30일 서울시를 현장 점검하고 “서울시가 피해자와 관련해 구체적 보호·지원 방안을 마련치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이에 서울시는 “27개 성폭력 피해자 지원 시설에 대해 사업비를 지원하고 있다”며 “피해자의 심신·정서 회복을 위한 치료 회복 프로그램 등을 지원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 역시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사건 기간을 포함해 오래전부터 해오던 사업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비난을 자초했다는 말까지 나온다.
 
 서울시와 인천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다시 관련 제도 개선에 나서기로 했다. “전 정부가 끝날 때 (수도관 관리매뉴얼은) 5500종류였다. 현 정부 들어서는 8770가지 개념적 매뉴얼로 늘어났다” 지난해 붉은 수돗물 사태가 불거졌을 때 조원철 연세대 토목환경공학과 명예교수가 한 말이다. 이 발언 후 1년 만에 당시 문제가 된 공촌 정수장에서 또다시 유충이 나왔다. 
 
 장미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서울시의 성희롱 방지·대처 매뉴얼만 보면 모범사례로 꼽힐 정도로 상당히 잘 갖춰져 있다”고 말했다. 숱한 현장조사나 허울좋은 매뉴얼을 갖추기보다는 “사건의 재발만은 막겠다”는 실천의지가 더욱 중요한 이유다.
 
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