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폭행 ‘백색테러’ 배후 추적한 언론인에 홍콩 법원 “유죄”

22일 홍콩 법원은 홍콩 공영 방송 RTHK의 차이위링 피디(가운데)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로이터=연합]

22일 홍콩 법원은 홍콩 공영 방송 RTHK의 차이위링 피디(가운데)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로이터=연합]

홍콩 법원이 지난 2019년 벌어진 시위대에 대한 무차별 테러를 취재한 언론인을 상대로 공공 데이터에 허위 정보를 제공하고 접근했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보안법 시행 이후 홍콩에서 언론인이 보도 관련 유죄 판결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로이터 통신은 “이번 사건은 중앙 정부의 지배력이 강화된 홍콩에서 언론의 자유가 붕괴되고 있다는 우려에 기름을 붓고 있다"고 비판했다. 
 
21일 밤 홍콩 지하철역의 흰 옷을 입은 남성들. 이들은 각목 등을 들고 역 입구를 에워싼 상태다.[로이터=연합뉴스]

21일 밤 홍콩 지하철역의 흰 옷을 입은 남성들. 이들은 각목 등을 들고 역 입구를 에워싼 상태다.[로이터=연합뉴스]

공영 라디오텔레비전홍콩(RTHK)의 프리랜서 PD인 차이위링(蔡玉玲ㆍ37)는 지난해 7월 ‘7·21 : 누가 진실을 갖고 있는가(7·21: Who Owns the Truth)’라는 23분 분량의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홍콩 송환법 철회 시위가 이어졌던 2019년 7월 21일 밤 위안랑(元朗) 전철역에서 벌어진 ‘백색 테러’ 사건의 배후를 추적한 내용이다.  
 
당시 테러 사건은 국내외 언론에 집중 조명을 받았다. 이날 밤 10시 흰색 상의를 입은 남성 100여 명이 몽둥이를 들고 역사 안으로 난입했고 전철에서 내리는 시위대와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부상당한 이들 중엔 만삭의 임산부와 이를 취재하던 기자도 포함돼 있었다.  
21일 위엔랑 지하철역에서 발생한 백색테러 희생자들이 피를 닦아내고 있다. [AP=연합뉴스]

21일 위엔랑 지하철역에서 발생한 백색테러 희생자들이 피를 닦아내고 있다. [AP=연합뉴스]

 
자정을 넘긴 22일 다음날 1시까지 곤봉 등을 동원해 역과 역 주위에서 시위대를 추격하며 공격했다. 쓰러져 피 흘리는 시위대와 시민들의 모습이 전세계로 타전됐고 폭력 조직 삼합회가 친중 세력의 사주를 받아 자행한 일이란 추측도 이어졌다. 하지만 당시 사건 현장에 출동했던 홍콩 경찰은 흰옷을 입은 이들로부터 몽둥이 몇 개를 압수했을 뿐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2019년 7월 21일 밤, 흰 셔츠를 입은 남성들이 차량에서 곤봉과 각목 등을 받아 들고 지하철역으로 향하고 있다. [유튜브 캡쳐]

2019년 7월 21일 밤, 흰 셔츠를 입은 남성들이 차량에서 곤봉과 각목 등을 받아 들고 지하철역으로 향하고 있다. [유튜브 캡쳐]

 
차이 피디는 당시 시민들이 촬영한 영상 중 곤봉 등이 실려있던 차량에 주목했다. 번호판이 식별되자 차주가 누군지 추적에 나섰다. 차주와 등록지를 확인하기 위해 홍콩 교통부에 차적 조회를 신청했는데 이 과정에서 언론이라는 신분은 밝히지 않았다. 신청 사유를 운수 관련이라고 쓴 것이다.  
차이 피디는 당시 동원된 차량의 소유주를 추적하기 위해 홍콩 교통부에 차적 조회를 신청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이라는 신분은 밝히지 않은 점이 문제가 됐다. 사진은 방송된 ‘7.21 : 누가 진실을 갖고 있는가'의 번호판 조회 장면. [유튜브 캡쳐]

차이 피디는 당시 동원된 차량의 소유주를 추적하기 위해 홍콩 교통부에 차적 조회를 신청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이라는 신분은 밝히지 않은 점이 문제가 됐다. 사진은 방송된 ‘7.21 : 누가 진실을 갖고 있는가'의 번호판 조회 장면. [유튜브 캡쳐]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해당 차량은 친중파 홍콩 입법회 의원 허쥔야오(何君堯)의 선거 운동원 A씨로 확인됐다. 테러가 벌어졌던 당일 허 의원은 위안랑 지하철역 부근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과 악수를 하는 장면이 포착된 바 있지만 당시엔 크게 주목받지 않았다. 그러나 차이 피디가 폭행 도구를 운반한 차량 소유주가 A씨였으며 허 의원과 함께 선거 운동을 벌인 장면까지 공개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허 의원은 차이 피디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우연히 길을 지나다 아는 사람들이 있어 인사를 나눈 것뿐”이며 “차주 A씨가 왜 그랬는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전면 부인했다.  
각목 등을 운반한 차량 소유주 A씨가 2016년 친중파 홍콩 입법회 의원인 허쥔야오의 선거운동을 했던 영상. [유튜브 캡쳐]

각목 등을 운반한 차량 소유주 A씨가 2016년 친중파 홍콩 입법회 의원인 허쥔야오의 선거운동을 했던 영상. [유튜브 캡쳐]

 
다큐는 경찰의 무기력한 법 집행도 비판했다. 당시 경찰은 최초 신고가 들어간 지 30분이 지나서야 현장에 도착했고 그때는 이미 흰색 옷을 입을 남성들이 사라진 뒤였다. 경찰이 빠지고 난 뒤 남성들이 다시 공격을 시작하는 등 당시 영상을 내러티브 형식으로 재구성해 경찰과 사전 공모가 이뤄졌을 의혹을 제기했다.  
 
차이 피디는 방송 4개월 뒤인 지난해 11월 차량 등록 정보에 허위로 접근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공판을 거쳐 22일 홍콩 법원은 “징역 6월 형을 고려했으나 직업적 특징을 고려해 6000 홍콩 달러(한화 90여 만원)에 처한다”고 판결했다. 쉬치웨이(徐綺薇) 판사는 “홍콩 법률 하에서 언론은 공공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며, 차이위링은 공공 데이터에 접근할 때 진실했어야 한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홍콩 법원이 백색 테러 사건과 관련해 처벌한 사람은 없다.
차이 피디는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고 시민들은 “저널리즘은 범죄가 아니다”는 현수막을 들고 그를 지지했다. [AP=연합]

차이 피디는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고 시민들은 “저널리즘은 범죄가 아니다”는 현수막을 들고 그를 지지했다. [AP=연합]

 
로이터통신은 차이 피디가 법정에서 나와 “법원은 유죄 판단할 수 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취재를 위한 조사가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저널리즘 추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시민들은 법원 앞에서 “저널리즘은 범죄가 아니다”는 현수막을 들고 그를 지지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판결 전날인 지난 21일 홍콩에서 가장 영예로운 언론상으로 꼽히는 캄이우위 자유언론상(Kam Yiu-yu Press Freedom Award)을 수상했다. 크리스 영 홍콩 언론인협회장은 “문제를 폭로한 것에 대해 형사 책임을 지게 한 것은 언론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라며 “언론의 자유를 파괴한 부끄러운 날”이라는 성명을 냈다.  
 
베이징=박성훈 특파원 park.seongh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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