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시시각각] 쇼트커트 페미니스트 사상 검증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인들의 소셜미디어에 쇼트커트 사진이 속속 올라왔다. 도쿄 올림픽 3관왕에 빛나는 안산 선수에게 가해진 ‘쇼트커트 페미니스트 사상 검증’에 대한 항의 차원이다. ‘숏부심(쇼트커트 자부심)’ ‘나도 페미니스트’ 같은 해시태그를 달았다. 외신들도 안산 선수 소식을 전했다. “안산 선수가 온라인 학대를 당했다”고 보도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단지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페미니스트라고 공격을 받다니, 국가적 망신이다. AFT통신은 “한국은 세계 12위 경제 대국이지만 여성 인권이 취약한 남성 지배적 사회”라고 전했다.
 
사실 이런 식의 ‘페미니스트 사상 검증’은 처음이 아니다. ‘소녀들은 왕자가 필요 없다’는 글귀가 쓰인 티셔츠를 입은 여자 성우, 해외에서도 화제작이 된 『82년생 김지영』을 읽은 여자 아이돌들이 온라인 괴롭힘을 당했다. 여자 성우는 ‘메갈(남혐 주의자)’이라는 낙인과 함께 더빙 중인 작품에서 하차해야 했다. 여자 아이돌들은 얼굴 사진이 찢기거나 불태워졌다. ‘오조오억’ 같은 ‘남혐’ 단어를 썼다고 웹툰 중단을 요구하는 일도 벌어졌다. 특히 남성 유저들이 많은 게임업계에서는 회사 직원 채용 과정에서 ‘페미’를 걸러내는 일도 생겼다. 명백한 노동권 침해다. 바로 얼마 전에는 집게손가락으로 집어드는 포즈가 남혐의 상징이라며 유사 이미지를 쓴 GS·BBQ 등 수많은 기업이 온라인 공격을 받았다. 상당수 기업이 해당 이미지를 수정·삭제했다.
 
안산 선수의 경우는 이런 ‘페미 사상 검증’이 국민적 영웅이랄 수 있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게, 그것도 올림픽 출전 기간 중 가해졌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쇼트커트를 했고, 여대를 다니고, 과거에 ‘오조오억(많다)’ ‘웅앵웅(웅얼거림)’ 같은 남혐 단어를 사용했다는 게 이유인데, 이미 관용적 표현이 된 오조오억이 왜 남혐의 증거인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오조오억은 BTS·세븐틴 같은 유명 남자 아이돌의 공식 계정에도 등장한다.
 
일각에서는 페미니스트 사상 검증은 기성세대가 이해하는 합리적인 페미니즘이 아니라 일부 래디컬(급진적) 페미니즘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것이라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안산 선수가 급진적 페미니스트란 얘기인가? 머리가 짧고(탈코르셋의 일환), 여대를 다니고, 오조오억 같은 단어를 쓰는 게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조건이라고?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일부 남초 커뮤니티의 백래시(반동)와 분풀이성 주장을 정치·사회적 의제로 대접한 탓이 크다. 일각의 문제 제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쉽게 무릎 꿇은 기업들이 멀쩡한 집게손가락을 남혐의 상징이라 인증한 게 온라인 효능감을 키웠다. 한마디로 이미 예견된 상황이라는 얘기다. 가부장제의 수혜를 체감하지 못하고 기성세대보다 사회경제적 곤궁에 처한 젊은 남성들의 박탈감을 이해하고 해법을 찾는 것과 그것을 안티 페미니즘의 근거로 정당화하고 또래 여성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리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른데도 말이다.
 
일부 래디컬 페미니즘의 흐름에 경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여자여서 일방적으로 폭행당했다고 거짓 증언을 했다가 남녀 쌍방폭행이 밝혀진 이수역 사건(2018년)을 예로 든다. 그러나 이처럼 극단적 사례를 가지고 페미니즘 일반을 악마화하며 마녀사냥하는 것, 그게 바로 여혐이다. 작금의 상황들이 젊은 여성들을 더욱 래디컬로 내몰 수 있단 생각은 하지 않는가.
 
짧은 머리든, 긴 머리든 도대체 왜 페미니스트인 게 문제가 되는가. 페미니즘은 젠더 갈등의 원흉이 아니다. 남녀·소수자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에서 타고난 성 차이를 이유로 성차별하지 말고 서로 강요된 성 역할의 억압에서 벗어나자는 새로운 관계 선언이라고 이해한다.
 
페미니즘을 오독하지 말라. 요즘은 남자 초등생까지 ‘페미가 싫다’를 입버릇처럼 외우고 다닌다고 한다. 시민 인권교육으로서 페미니즘 교육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