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발상]고구려 장수왕은 '노잼'시대? 왜 사극이 안 나올까

 
“북위 사람들이 북연을 자주 쳐서 북연이 날로 위태롭고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북연왕 풍홍(馮弘)이 말하기를 '만일 일이 급하면 동쪽으로 고구려에 의지하였다가 나중에 나라를 일으키겠다'고 하고, 상서(尙書) 양이(陽伊)를 몰래 보내 우리에게 맞이해주기를 청하였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장수왕 22년) 

때는 중원이 어지럽던 5호 16국 시대. 한국사에서 보기 드물게 숨 막히는 외교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중원의 패자는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 황제 탁발도는 훗날 세조(世祖)로 추존될 정도로 강력한 군주였습니다. 그리고 북위와 고구려 사이에는 한족이 세운 북연(北燕)이 있었는데, 이무렵엔 국력이 약해져 샌드위치 신세였습니다.

북위의 침공 준비 소식이 전해지자 북연의 조정은 친북위파와 친고구려파로 나뉘었고, 왕 풍홍은 일단 고구려에 망명하기로 마음을 굳힙니다. 이런 가운데 북위가 군사를 일으키자 고구려도 장수를 급파해 풍홍을 확보하도록 했습니다.

영화 '안시성' 한 장면. [사진 NEW]

영화 '안시성' 한 장면. [사진 NEW]

북연의 왕을 확보하라!
이렇게 되면 시간 싸움입니다. 누가 먼저 북연의 수도에 도착하느냐가 관건인 상황. 먼저 도착한 것은 북위였습니다.
앞서 말했듯 북연 조정은 친북위파와 친고구려파로 나뉘었는데, 친북위파였던 상서령 곽생이 성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운명의 여신이 고구려에게 미소 짓습니다. 신중했던 북위군은 성문이 너무 쉽게 열리자 계략이 아닌가 주춤했고, 이 사이에 고구려군이 도착한 것이죠.

다급해진 곽생은 왕을 공격했고, 풍홍은 급히 동쪽 성문을 열어 고구려군을 들여보내면서 일촉즉발의 위기를 모면합니다. 성을 접수한 고구려군은 곽생 측을 제압했고, 성 밖에 있던 북위의 군대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수)왕이 갈로와 맹광을 보내 무리 수 만을 거느리고 양이를 따라 화룡(和龍)에 이르러 북연왕을 맞이하게 하였다. 갈로와 맹광이 성에 들어가 군사들에게 해어진 옷을 벗게 하고, 북연의 무기고에서 정교한 무기를 취하여 나누어 주고 성 안을 크게 약탈하였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장수왕 24년 4월)

장수왕 시대의 동아시아 정세 [사진 KBS]

장수왕 시대의 동아시아 정세 [사진 KBS]

눈앞에서 먹이를 놓친 북위 측은 펄펄 뛰었을 테죠. 북위의 탁발도는 급히 고구려로 사신을 보내 풍홍을 보내라고 독촉했지만, 장수왕은 "풍홍과 함께 왕의 가르침을 잘 받들겠다"고 약을 올리며 사신을 되돌려보낼 뿐이었습니다. 분노한 탁발도는 고구려를 공격하라고 지시했지만, '실익이 없다'는 주변 만류로 결국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풍홍을 데려온 것은 단순히 풍홍이 예뻐서가 아닙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왕이 망명하면 그를 따르던 지도층과 백성들도 함께 따라갔습니다. 『삼국유사』도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의 반란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갔을 때, 많은 무리가 따랐다고 전합니다.

중국 사서『십육국춘추』에는 당시 풍홍을 따라온 북연 주민이 1만 호라고 하는데, 1호 당 5명으로 계산하면 대략 5만명이 고구려로 왔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고구려의 노동생산력에도 도움이 됐을 뿐 아니라, 훗날 백제와의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다만 고구려에 의지한 풍홍의 최후는 그다지 행복하진 않았습니다.  

"풍홍이 요동에 도착하자 왕이 사신을 보내 그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용성왕(龍城王) 풍군(馮君)이 여기에 와서 들판에 묵으니 군사와 말이 고달프겠다'고 하였다. 풍홍이 부끄럽고 화가 나서 황제의 명(制)을 칭하며 이를 꾸짖었다. 왕이 그를 평곽(平郭)에 두었다가 곧 북풍(北豊)으로 옮겼다."

장수왕의 하대에 분개한 풍홍은 재차 송나라로 망명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됩니다. 

"풍홍이 이를 원망하여 송(宋)에 사신을 보내, 맞이해주기를 청하였다. 송 태조가 사신 왕백구 등을 보내 그를 맞이하게 하고, 아울러 우리에게 비용을 보내라고 명하였다. 왕이 풍홍을 보내고 싶지 않아 장수 손수와 고구 등을 보내 풍홍을 북풍에서 죽이고, 그 자손 10여 인도 죽였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장수왕 26년 3월)

나름 칭제(稱帝)했던 풍홍입니다. 한국 역사상 중국 황제를 데려와 이런 굴욕적인 최후를 안긴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고구려시대 석릉인 장군총.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앙포토]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고구려시대 석릉인 장군총.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앙포토]

사극에선 인기 없는 장수왕 
97세까지 산 장수왕은 재위기간이 무려 79년입니다. 부친 광개토대왕이 39세에 급사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중국 왕조에 굴복하지 않았고, 한성을 함락해 백제를 남쪽으로 밀어내는 등 고구려의 전성기를 완성한 국왕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런데도 사극에서는 대우가 박한 편입니다.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광개토대왕처럼 만주로 시원하게 뻗어가는 정복 전쟁을 벌이지 않아서였을까요. 장수왕이 남진 정책을 펴는 바람에 고구려의 시선이 대륙에서 한반도로 좁아졌다고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장수왕의 시대를 살펴보면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과 메시지가 적지 않습니다.

장수왕 시대의 동아시아  
장수왕이 재위한 5세기는 국제 질서에 많은 변동이 있었습니다.
중국은 5호 16국의 혼란을 벗어나면서 북쪽의 북위와 남쪽의 송, 남북조 체제로 굳어져 갔습니다. 한반도에서는 고구려의 속국이던 신라가 성장하면서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 고구려의 주적은 백제였습니다. 백제가 근초고왕 대에 평양성까지 쳐들어 와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치욕을 안긴데다, 한강 유역을 놓고 한창 경쟁 중이었습니다. 
고구려의 반(反)백제 정서는 광개토대왕비에 유독 백제만 백잔(百殘)이라고 낮춰 부른데서도 드러납니다.

5세기 동아시아의 정세 [중앙포토]

5세기 동아시아의 정세 [중앙포토]

 
①고구려의 대 백제 포위망
장수왕이 백제를 압박하면서 가장 공들인 것은 '대(對) 백제 포위망'이었습니다.
중국의 남조(송)-고구려-말갈-신라로 이어지는 포위망을 펼치려 한 것이죠. 특히 신경을 쓴 것은 송과의 관계였습니다. 백제는 송과 밀착해 선진 문물을 흡수해 국력을 신장하기도 했고, 한반도의 패자로 공인받으려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는 최소한 둘의 관계를 단절시켜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송서(宋書)』에는 “(439년) 태조가 북위를 토벌하고자 고연에게 말을 바치라 조서를 내리자, 800필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고연은 장수왕입니다. 당시 말은 중요한 전략물자였습니다. 특히 유목민족(선비족)이 세운 북위는 기마병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송나라는 말이 없으면 북위를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말은 대부분 북위가 점령한 초원 지대에서 나왔기 때문에 남쪽에 있던 송나라로서는 고구려에 요청한 것이죠. 고구려는 소중한 전략물자를 공짜로 넘겼을까요. 당연히 고구려 입장에선 송과 백제가 밀착하지 않도록 요구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송이 어느 정도 북위를 견제해줘야 그 옆에 있는 고구려가 편했습니다.

장수왕이 구상한 대백제 포위망

장수왕이 구상한 대백제 포위망

평양 천도 역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백제와 중국의 연결을 막으려면 무엇보다 바닷길을 장악해야 합니다. 평양은 대동강을 통해 서해와 연결되기 때문에 내륙인 국내성에 있을 때보다는 바다로 진출하기 좋았습니다.
실제로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백제는 중국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문주왕 2년(476), 동성왕 6년(484) 중국 남조로 보낸 사신이 고구려군의 방해로 되돌아오는 일이 벌어집니다.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바닷길을 장악한 장수왕이 제주도에서 말을 확보했을 것이라는 추론도 있습니다. 제주도에는 대흘(大屹), 조흘(鳥屹) 등 ‘흘’이 붙인 지명이 많은데, 미추홀처럼 고구려에서 성이나 마을을 의미하는 ‘홀(忽)’이라는 접미사에서 유래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 언어학계에서도 주목하는 부분입니다.

②백제의 대 고구려 포위망  
백제 입장에선 어땠을까요. 장수왕의 구상대로 포위망이 완성되면 백제는 생존이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백제는 고구려의 구상을 역으로 뒤엎기로 합니다. 북위-백제-신라-가야-왜를 연결해 '대 고구려 포위망'을 만드는 것이죠.

먼저 북위 입장에선 북연의 풍홍 사건도 있고, 송에 손길을 내미는 고구려의 태도가 못마땅하던 참이었습니다. 때를 노린 백제 개로왕은 북위에 고구려를 치라고 권유하는 국서를 보냅니다.
"지금 연(장수왕)의 죄로 나라는 어육(魚肉)이 되었고, 대신들과 권세 있는 귀족들의 살육이 그치지 않으며, 죄악이 쌓이고 넘쳐서 백성들은 허물어져 흩어지고 있으니, 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요 폐하께서 손을 쓰실 때입니다."

KBS 사극 '근초고왕' [사진 KBS]

KBS 사극 '근초고왕' [사진 KBS]

특히 백제는 '대 백제 포위망'의 가장 약한 고리를 노렸습니다.
광개토대왕 시대부터 고구려에 종속 관계였던 신라는 차츰 고구려의 그늘을 벗어나려 하던 차였습니다. 특히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의 왕위 교체(실성왕→눌지왕)까지 개입하자 신라 지배층에는 '안티 고구려' 정서가 퍼졌습니다.

그러다가 고구려의 장수가 강원도 삼척에서 사냥을 하다가 신라군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고(450년). 얼마 후엔 고구려가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입(454년)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사실상 파탄이 납니다.
백제가 먼저 부추겼는지, 신라의 독자노선 수립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복합적으로 동시에 작용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하지만 신라로서는 백제의 공동 전선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나제동맹을 맺습니다.

475년 장수왕이 백제 수도였던 한성(지금의 서울)을 공격하자 신라는 백제에 1만명의 구원군을 보냈고, 고구려는 481년 보복공격을 감행해 신라의 7개 성을 점령하고 미질부(彌秩夫:경북 흥해)까지 진출합니다.

개로왕이 구상한 대고구려 포위망

개로왕이 구상한 대고구려 포위망

일단 힘으로 신라를 눌러놓긴 했지만, 고구려 입장에선 고민이 커졌습니다.
자칫 북위-백제-신라-가야-왜의 대고구려 포위망이 완성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국경이 인접한 북위와 긴장 관계가 계속되면 군사력을 남쪽으로 돌리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장수왕은 후반부터 다시 북위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공을 들입니다. 북위에 공물을 2배로 늘려 보내기도 하고, 북위 왕실과 혼담이 오가는 정도까지 개선하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이때 대 고구려 포위망이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백제의 구상은 이후 고구려를 흔드는 남쪽 왕조(백제-신라)의 독트린이 됐습니다. 그리고 태종 무열왕 때 신라가 당과 손을 잡아 백제를 무너뜨린 뒤 현실화됩니다.

태종 무열왕의 일생을 다룬 KBS 사극 '대왕의 꿈' [사진 KBS]

태종 무열왕의 일생을 다룬 KBS 사극 '대왕의 꿈' [사진 KBS]

고구려의 유산은 군사 아닌 외교
중국이 남북조로 분열한 170년 동안 고구려는 남조와 북조의 대립을 이용하며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589년 수나라의 통일은 고구려가 누리던 특수가 만료됐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중국에 강력한 통일 왕조가 들어서면 그 창끝은 요동과 한반도 북부로 향하는데, 한 무제 때 고조선 정벌이 대표적입니다. 이를 피하려면 신라처럼 중국의 세계 전략 안에 들어가야 했지만, 고구려는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중국의 주변 세력을 활용해 중국을 흔들어놓는 방식을 택합니다.

607년 6월 북쪽 변경 일대를 순행하던 수 양제는 고구려 사신이 동돌궐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고구려가 초원의 강자 돌궐과 손을 잡는 것은 북쪽과 동쪽이 포위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후 수나라가 국력을 소진해가며 3차례나 고구려 원정을 벌인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나라는 역포위망을 짭니다. 백제-신라-일본을 묶어 고구려를 포위하는 구도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죠. 그때까지 계속 무시했던 일본에 대해서도 태도를 바꿔 사신을 보내고, 처음으로 정식 국가로 인정합니다.

영화 '안시성' 한 장면. [사진 NEW]

영화 '안시성' 한 장면. [사진 NEW]

중국의 통일왕조와 고구려의 치열한 외교전은 안시성 싸움에서도 변수가 됐습니다.
당 태종이 철군한 결정적 이유는 양만춘의 분전보다는 설연타라는 유목 세력의 공격 때문이었습니다. 배후를 찔린 당 태종은 말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지요. 중국 사서 『자치통감』은 설연타가 당나라를 공격하기 전 고구려의 사신이 찾아갔다고 전합니다.

영화나 드라마, 만화에서 고구려를 다루는 방식은 언제나 강력한 군사력과 스펙터클한 전투장면입니다. 아니면 '태왕사신기'처럼 온갖 판타지가 겹쳐진 광개토대왕의 신화적 활약상이죠. 물론 대중문화의 성격상 대중을 흥분시키는 '재료'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한 번쯤은 장수왕 시대가 맞닥뜨린 고구려의 고민과 노력을 다루는 대중작품을 만나보고 싶다는 바람을 갖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미·중 패권 다툼과 대만 문제, 중국과 호주의 갈등 등으로 국제 정세가 복잡한 때는 말이죠.

※이 기사는 최일례 『장수왕대 고구려의 對中外交와 그 動因』, 김철민 『高句麗 長壽王代의 對宋外交와 그 背景』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