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에 체포된 안중근 구하라' 고종은 밀사 2명 급파했다

안중근 의사 [중앙포토]

안중근 의사 [중앙포토]

 

 
배영대 학술전문기자 balance@joongang.co.kr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은 1909년 10월 26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12년 전 오늘이다. 이날에 맞춰  ‘안중근 하얼빈 의거’의 전모를  알려주는 일본 외무성 기록이 국내 출간됐다.

 일본 외무성 산하 외교사료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토 공작 만주 시찰 일건(伊藤公爵滿洲視察一件)’이란 자료가 그것이다. 


이를 석오문화재단(이사장 윤동한) 부설 한국역사연구원(원장 이태진)이 『그들이 기록한 안중근 하얼빈 의거』(태학사)라는 이름으로 25일 펴냈다. 국내 서점에는 하얼빈 의거일인 26일 배포될 예정이다. 안중근 연구의 새로운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기록한 안중근 하얼빈 의거' 표지. [사진 태학사]

'그들이 기록한 안중근 하얼빈 의거' 표지. [사진 태학사]

하얼빈 의거가 일어나자 일본 정부는 외무성을 대책 본부로 삼고, 정무국장 구라치데스기치를 현지로 급파했다. 

이후 외무성은 만주 일원을 비롯한 전 세계 18개국 약 80개 기관과 1778건의 보고문 · 훈령 등을 주고받는다. 

이번에 출간된 자료집에는 그 기록들이 담겨 있다. 이 사건의 혐의자 및 연루자 색출, 재판 절차, 변호인단 동향 파악, 한인 반일운동가들 감시, 각국의 반응,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 장례 절차 등을 망라하고 있다.  

 

1910년 2월 22일,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 오토리 후지타로가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에게 보고한 문건.,고종의 밀사 두 사람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후의 활동을 정탐한 내용. [사진 태학사]

1910년 2월 22일,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 오토리 후지타로가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에게 보고한 문건.,고종의 밀사 두 사람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후의 활동을 정탐한 내용. [사진 태학사]

이번 출간을 주도한 한국역사연구원 측에 따르면, 이 자료는 1995년 보훈처에서 도쿄 국제한국연구원최서면 원장(2019년 작고)이 제공한 복사 자료를 이용하여 『아주(亞洲) 제일 의협 안중근』(3책)이란 이름으로 출간된 적이 있지만, 흑백 복사 상태가 나빠 관련 학계에서 거의 활용되지 못하고 사장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들이 기록한 안중근 하얼빈 의거』는 모든 보고문과 훈령 등에 제목을 붙여 목록을 만들었고, 원문은 별도의 DVD로 제공한다.  

일반 독자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주요 자료 24건에 대한 해설과 번역문을 실었다. 

주요 자료 중 첫 번째로 실린 것은,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도시히코가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에게 1909년 12월 6일 보낸 수사 방법 보고 및 특별비 지출 방안 품청에 관한 2건이다. ‘한국인 밀정’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어 눈길을 끈다.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 오토리 후지타로가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에게 보낸 문건.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인들의 동향 보고. [사진 태학사]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 오토리 후지타로가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에게 보낸 문건.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인들의 동향 보고. [사진 태학사]

첫 번째 ‘보고 건’에 따르면, 수사 인력의 부족 및 곤란함을 토로하면서 “우에하라  육군소좌가 다년간 사용한 통역 한국인 최상운(崔尙雲)”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한국인 김태원(金泰元)”을 밀정으로 사용하여 정탐하고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방법을 계속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사료되므로 앞으로는 필요한 비용을 지불하여 보냄과 동시에 장려하는 뜻으로 수시로 상당한 보수를 주어 점차 그들을 독려하고 극력 정보 수집에 힘쓸 생각”임을 전하고 있다. 

외무성 산하 각 영사관이 한국인을 밀정으로 매수하여 활용한 정황을 살펴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가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에게 1909년 12월 6일 보낸 수사 방법에 관한 보고. [사진 태학사]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가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에게 1909년 12월 6일 보낸 수사 방법에 관한 보고. [사진 태학사]

이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신문인 ‘대동공보’ 사장이자 변호사인 미하일로프가 영국 변호사 더글러스와 함께 안중근 변호 약정을 했다가 좌절되었던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도 포함돼 있다. 

또 ‘한국 황제(韓皇)의 밀사 송(宋) 모에 관한 건’이란 자료도 흥미롭다. 

이태진(서울대 명예교수) 원장에 따르면, 안중근의 신병이 일본 법정으로 넘어가자 국제변호인단 구성에 소요되는 비용, 안중근 가족의 생계를 위한 비용 등을 마련하기 위한 ‘안중근 구제회’ 관련 자료로 보인다. 

서울의 황제(고종)는 이를 돕기 위해 2인의 밀사를 파견했는데,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인 민회에서 처음에는 그들을 의심하였지만 곧 황제가 보낸 사람인 것을 확인하고 서로 협의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원장은 “안중근 연구를 위한 자료는 아직 조사해서 보급해야 할 것이 많다. 어쩌면 가장 긴요한 것이 빠진 상태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본 외무성 자료의 간행은 그 결함을 해소하는 작업으로 학계에 새롭게 이바지하고자 기획되었다”고 밝혔다.  

이 자료는 1910년 3월 16일 오전 10시 사형 집행에 임한 안 의사의 마지막 모습도 전해준다. 통역을 담당했던 경찰 소노키스에키의 기록이다. 

안중근은 처형 날인데도 평상과 다름없는 침착한 모습이었고, 사형 집행장에 들어서서 ‘동양평화만세’ 삼창 기회를 요구했지만, 임석 검찰이 허용하지 않자 잠시 기도를 올릴 시간을 요청하고 끝난 뒤 교수대에 올라갔다고 기록해 놓았다. 

유해를 법원이 준비한 침관(寢棺)에 눕혔을 때 안중근은 가슴에 성화(聖畫)를 품고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