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오 "5년 전만 해도 잘 안되는 게 '팔자'려니 했는데..."

영화 '로그 인 벨지움'에서 유태오가 지난해 봄 벨기에 호텔에서 고립된 당시 직접 촬영한 장면. [사진 엣나인필름]

영화 '로그 인 벨지움'에서 유태오가 지난해 봄 벨기에 호텔에서 고립된 당시 직접 촬영한 장면. [사진 엣나인필름]

코로나19 확산 초기,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갑작스러운 팬데믹 봉쇄에 갇혔다면. 
지난해 봄 배우 유태오(40)가 겪은 실화다. 해외 드라마(‘더 윈도’) 촬영차 벨기에 앤트워프에 간 그는 팬데믹 선포로 호텔에 혼자 15일이나 발이 묶였다. 유럽 현지 스태프는 각자 집으로 흩어졌다. 한국행 비행기 표는 기약 없이 취소됐다. 식당은 닫히고 근처 마트 진열대는 비어갔다. 뭉쳐있지 말라는 지침 탓에 대화 상대도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이 낯선 나라에서 코로나에 걸린다면….’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그땐 강박에 빠졌죠.” 최근 화상 인터뷰로 만난 유태오의 말이다. 당시 하필 요절한 할리우드 배우 히스 레저의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단다. “히스 레저는 유명 배우고 그가 스스로 찍은 아카이브를 (사후에) 다른 감독이 편집해 다큐를 만든거죠. 저는 스타도 아니었고….”
죽을 수도 있다는 상상 속에 그가 한 선택은? 셀프 영화 찍기다. 그의 각본·연출로 1일 개봉한 ‘로그 인벨지움’의 탄생 배경이다.  

휴대폰 촬영해 직접 편집한 '코로나 셀프 다큐' 

촬영은 100% 휴대폰, 기본 편집도 태블릿PC로 직접 했다(개봉 결정 후 이를 전문 편집자가 다시 한번 매만졌다). 당시 상상으로 빚은 ‘또 다른 나’까지 1인 2역을 맡았다.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며 글 대신 영상으로 쓴 에세이가 완성됐다. 이를 본 영화계 지인의 권유로 서울 분량을 추가 촬영해 개봉까지 하게 됐다. 총 80시간 촬영분을 65분 영화로 압축해냈다.“속마음을 솔직히 표현했고 20년 후 나를 돌아봤을 때 이런 식으로 생각했구나, 재밌게 보려 했던 영상이죠. 다른 사람들도 호의적으로 잘 봐주셔서 고마울 뿐이에요.”
대만 영화감독 차이밍량은 “사람이 외로울 때 그 사람은 진짜 자기 자신이 된다”고 했던가. 코로나 속 고독이 드러낸 ‘인간 유태오’의 민낯은 꽃과 요리와 예술을 사랑하는 취향이 매순간을 채운다. 그 가운데 영화가 있다.  

"영화 자체에 바치는 러브레터죠" 

독일 교포 2세인 그는 사진작가인 아내 니키 리와 한국에 와서 이재용 감독의 영화 ‘여배우들’(2009) 단역부터 시작했다. 고려인 가수 빅토르 최를 연기한 러시아 영화 ‘레토’로 2018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며 무명을 벗기 시작했다. 여전히 서툰 한국말 발음 등 배우로서 고민도 영화에 그렸다. “멜랑콜리했던 과거, 시니컬한 현재, 미래의 꿈”에 대한 또 다른 나와의 대화를 각각 독일어, 영어, 한국어에 담아 표현했다.

영화 '로그 인 벨지움'. [사진 엣나인필름]

영화 '로그 인 벨지움'. [사진 엣나인필름]

명작영화 오마주 장면도 많다. 음식 솜씨가 좋은 그가 손수 만든 소로 만두를 빚어 먹는 장면은 홍콩영화 ‘중경상림’에서 착안했다. 다큐와 극영화의 오묘한 경계는 독일 감독 베르너 헤어초크의 작품들, 사진작가인 아내 니키 리를 두 개의 자아로 나눠 표현한 다큐 ‘니키 S. 리라고도 알려진’ 등에 영향을 받았다. 4년 전 그가 아티스트 백남준을 연기한 단편 ‘티비 첼로’, 빔 벤더스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 오선 웰스 감독의 ‘거짓의 F’, 즐겨 본 한국영화 ‘접속’ 등의 흔적도 발견된다. “어릴 때부터 힘들었을 때, 항상 영화가 주는 사랑과 위로로 생활을 버틸 수 있었어요. 그런 영화 자체에 바치는 러브레터 같기도 하죠.”

이제훈·천우희 깜짝 등장해 감상평 

영화뿐 아니다. 미국 행위예술가 크리스 버든을 좋아했던 그는 마침 앤트워프에 있었던 버든의 대형 작품 ‘빔 드랍’을 자주 보러 가 위로받았다고 했다. 부서진 건축 구조물들을 공중에서 젖은 시멘트 바닥으로 내리꽂아 만든 작품이다. “하늘과 땅, 죽음과 삶, 그 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심리상태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서울 촬영 분량엔 배우 이제훈천우희, 이재용 감독 등 지인들과 벨기에에서 찍은 영상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장면도 있다. “드라이한 유머죠. 평론가가 저를 비평하기 전에 스스로 비평하고 싶었어요. 영화에서 또 다른 제가 저 자신을 바라보며 ‘아이고 엄살 부리네’ 말했던 것처럼요.”


"잘 안되는 팔자랬는데 미국 진출, 신기하죠"

코로나19로 유럽에서 고립된 경험을 영화 '로그 인 벨지움'으로 만든 배우 유태오가 11월 23일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시사 후 간담회에 참석했다. [사진 엣나인필름]

코로나19로 유럽에서 고립된 경험을 영화 '로그 인 벨지움'으로 만든 배우 유태오가 11월 23일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시사 후 간담회에 참석했다. [사진 엣나인필름]

이번 영화 제작사로 표기된 ‘태오닉 모’는 그와 아내의 이름을 따 만든 영화사다. “지금 니키를 중심으로 진행 중인 작품이 하나 있고, 1~2년 후에 둘이 같이 해보고 싶은 기획도 있다”는 그는 “배우로서 연기에 몰입하면서, 헤쳐나가려 한다”고 했다. 최근 그는 영화 ‘미나리’의 미국 영화사 A24와 CJ ENM이 함께 만드는 영화 ‘패스트 라이브스’의 주연에 캐스팅되며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됐다.  
“데뷔하고 뒤늦게 알려졌지만 제가 쌓아놓은 것을 천천히 알려드리면서 배우로서 내공이 될 수 있었죠. 한국을 대표해 미국까지 가게 됐고요. 우리나라에서 교포로서 연기하는 게 쉽지 않았는데, 세계적 관심과 시장이 바뀌면서 한국이 리더가 됐잖아요. 이런 타이밍 덕분에 제가 태어나고 자란 배경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게 너무나 고마워요. 삶의 운인 것 같아요. ‘운명’이라 해야 하나. 5년 전만 해도 잘 안 되나보다, ‘팔자’라며 살았는데 참 신기하죠. 아무도 안 믿어줄 때 한 사람, 제 아내가 믿어준 게 힘이 됐어요. 이 영화도 부끄럽지 않게 만들었어요. 편안하게 보고 좋은 메시지를 가져가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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