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25마리 죽고 배우도 반기…83년전 미국판 '태종 이방원' 논란

KBS ‘태종 이방원’ 제작진이 경찰에 고발당했다. 촬영장에서 말의 발목에 와이어를 묶어 넘어뜨렸다는 동물학대 논란이 제기되면서다. 한국동물보호연합 등 100여개 동물단체는 "이들이 사용한 촬영 기법은 미국에선 이미 1939년 이후 금기시된 것"이라며 "83년이 지난 오늘날 공영 방송에서 버젓이 사용되고 있다는 게 놀랍다"고 비판했다. 동물권 행동 카라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상처를 입은 말은 촬영 1주일 뒤 죽었다.

1936년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 경기병 여단의 돌격의 한 장면. 유튜브 캡처

1936년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 경기병 여단의 돌격의 한 장면. 유튜브 캡처

 

할리우드에선 83년 전 논란

1936년 미국 할리우드에선 '태종 이방원'처럼 와이어를 사용해 말을 넘어뜨린 영화가 개봉했다. 19세기 크림전쟁을 다룬 '경기병 여단의 돌격'이었다. 이 영화엔 영국 기마병 600명이 대포로 무장한 러시아군에 맞선 발라클라바 전투를 재연한 장면이 나온다. 당시 제작진은 기마병들이 쓰러지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철사로 된 덫을 설치했다. 이 촬영 뒤 말 25마리가 숨졌고, 승마를 즐겼던 주연 배우 등이 감독에게 거세게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KBS 1TV 대하 드라마 '태종 이방원' 촬영 중 동물을 학대했다는 논란이 제기됐다. 사진 KBS, 동물자유연대 인스타그램

KBS 1TV 대하 드라마 '태종 이방원' 촬영 중 동물을 학대했다는 논란이 제기됐다. 사진 KBS, 동물자유연대 인스타그램

이 사건의 파장으로 3년 뒤 미국인도주의협회(AHA)는 미국 배우조합(ASG)과 영화에 동물이 등장할 경우 모니터링을 거쳐야 한다는 협약을 맺었다. 1980년대부턴 이 협회의 인증을 받은 영화·드라마 제작사는 '아무 동물도 다치지 않았습니다'라고 관객들에게 알리는 문화도 정착됐다. 지금도 동물이 출연한 미국 영화 제작진 소개 자막에선 이 문구가 자주 등장한다.

2020년 국내에도 가이드라인 배포

국내에 동물 촬영에 관한 가이드라인이 없는 건 아니다. 지난 2020년 카라의 대표였던 임순례 영화감독이 67쪽 분량의 '동물 출연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전국 방송사·제작사·예술대학에 배포했다. 카라에 따르면 미국인도주의협회의 기준 중 필수적인 것만 추려서 국내 사정에 맞게 완화한 수준이다. 여기엔 '동물의 싸움, 사냥, 죽음을 묘사한 장면은 컴퓨터 그래픽(CG)으로 구현해야 한다', '말의 걸음걸이에 이상을 주는 장치나 약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등의 준수 사항이 동물별로 적혀있다.


KBS 윤리강령에는 "동물 세팅촬영 시 책임 프로듀서와 협의하고 시청자에게 알려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하지만 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는 없었다는 게 동물단체의 주장이다. 임순례 감독은 "누가 보더라도 스턴트맨과 말에게 굉장히 치명적인 위험을 가할 수 있는 촬영방식이다. CG 처리나 다른 기술적 방법을 고안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임 감독은 "시간과 비용의 제약에 국내 촬영장에선 이런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동물 학대 논란에 휩싸인 KBS는 "며칠 전부터 혹시 발생할지 모를 사고에 대비해 준비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해명했다. 죽은 말에 대해선 "사고 직후 말이 스스로 일어났고 외견상 부상이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고도 했다. 하지만 동물단체 연합은 드라마를 책임지고 폐지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정식 사과와 재발 방지책도 촉구했다.

21일 한국동물보호연합 등 동물보호단체가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태종 이방원' 드라마 동물학대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1일 한국동물보호연합 등 동물보호단체가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태종 이방원' 드라마 동물학대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동물학대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며 국내외 촬영장에서 유사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영화 '호빗: 뜻밖의 여정'(2012), '라이프 오브 파이'(2015), '캐리비안의 해적'(2017) 등 유명 영화가 동물 학대 의혹을 받았다. 국내에선 SBS 정글의 법칙(2013), 황후의 품격(2019) 등이 크고 작은 논란에 휩싸였다. 김현지 카라 정책팀장은 "업계 특성상 적발이 쉽지 않아 제작사의 책임 입증이 어렵다"면서 "이번 사건을 계기로 촬영장에서의 동물 보호에 대한 인식이 제고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