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걸·이규진 2심도 일부 유죄…"양승태 공모는 불인정"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전직 법관들에게 항소심도 일부 유죄 판단을 내렸다. 다만 항소심 재판부는 1심과 달리 대법원과 법원행정처에 법관의 재판사무에 관한 ‘지적 권한’이 없다며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공모 혐의는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 상임위원. 연합뉴스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 상임위원. 연합뉴스

전‧현직 14명 기소 중 유일한 유죄 2명, 형량은 가벼워졌다  

서울고법 형사13부(부장판사 최수환 최성보 정현미)는 27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로 기소된 이민걸(61·사법연수원 17기)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에게 벌금 1500만원을, 이규진(59·18기)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했다.

대신 두 사람의 통합진보당 행정소송 재판 개입 혐의 일부를 무죄로 판단해 1심보다 형량을 줄였다. 1심에서 이 전 실장은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이규진 전 상임위원은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으로 기소된 전·현직 법관 총 14명 가운데 지금까지 유죄가 인정된 사람은 이들 두 명 뿐이다. 

이민걸 전 실장은 1심과 마찬가지로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와해시키려 한 혐의와 국민의당 국회의원의 정치자금법 위반 재판부의 심증을 알아내라고 지시한 혐의가 유죄로 인정됐다. 


이 전 양형위원은 통진당 행정소송 대응 보고서를 행정처 심의관에게 작성하게 하고 일선 법원 수석부장판사에 전달한 혐의, 파견 법관을 이용해 헌법재판소 내부 사건 정보와 동향을 수집한 혐의 등은 1심과 마찬가지로 유죄를 받았다.

재판부는 이 전 실장에 대해선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과 함께 법관 연구모임 지원 업무에 관한 사법행정권을 남용하고, 학문적 결사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지적했다. 

이 전 양형위원에 대해선 “피고인의 행위는 사법의 독립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국민의 신뢰를 훼손하는 행위”라며 “재판에 개입하는 행위로 불법성이 무겁다”고 강조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서울중앙지검으로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서울중앙지검으로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1심 ‘新직권남용론’ 깼다…양승태·박병대 등과 공모 혐의 불인정

항소심 재판부는 1심 재판부의 새로운 직권남용론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앞선 1심에서는 재판 개입을 직권남용죄로 봤다.  

원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32부(부장 윤종섭)는 458쪽에 이르는 판결문 본문에 ‘이 사건에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해석’이라는 별도 목차를 만들어 54쪽을 할애하면서까지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재판사무 핵심영역에 대해 지적할 수 있는 권한(지적권한)에 대해 설명했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는 재판사무 ‘지적(指摘) 권한’이 있지만 지적을 넘어 ‘권고’가 되는 순간 직권남용이 될 수 있다는 취지였다. 지적과 권고의 차이를 재판개입 행위라는 직권남용죄의 경계로 삼은 것이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죄형법정주의(범죄·형벌은 법률에 규정돼야 한다는 원칙)를 벗어난 판결이라는 반발이 일기도 했다.  

2심의 판단은 달랐다. 항소심 재판부는 “재판권과 사법행정에 관한 법령을 종합적‧실질적으로 살펴봐도 지적 권한이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에 속한다고 해석되지 않는다”고 했다. 또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잘못된 판결이나 미숙한 법관의 재판 과정에서의 잘못을 시정하기 위한 지적 권한 역시 현행 사법제도 내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헌법 제103조가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명시한 점도 언급했다.

이에 따라 대법원장 또는 법원행정처의 공모가 있어야만 인정되는 재판 개입은 무죄로 뒤집혔고, 1심과 마찬가지로 유죄를 선고한 부분도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 등과 공모는 인정되지 않았다.

지적 권한을 인정할 경우 헌법에 명시된 사법권의 독립에 정면으로 반할 뿐만 아니라 재판권에 대한 사법행정권의 상시적인 감시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윤 부장판사의 1심 판결처럼 법원행정처의 재판사무 지적권을 인정하게 되면 헌법상 재판의 독립에 정면으로 위배한다며 무죄를 선고한 임성근 부장판사 항소심과 같은 맥락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뉴스1

서울중앙지방법원.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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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심 재판부의 논리는 ‘직권이 없으면 직권남용도 없다’는 기존 법리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직권남용죄가 성립하려면 피고인의 행위가 직무상 권한에 포함돼야 한다. 남용할 직권이 없으면 자연히 남용도 인정될 수 없다. 

이에 관해 2심 재판부는 “일반적 직무권한과의 ‘관련성’ 여부에 따라 ‘직권의 월권적 남용’을 인정할 경우 그 처벌 범위가 부당하게 확대될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

 
이 때문에 이규진 전 위원이 1심에선 유죄로 인정했던 옛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지방의회 의원의 행정소송 1심 광주지법 재판에 개입한 혐의, 통진당 국회의원의 행정소송 상고심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라고 부당한 지시를 한 혐의 등이 무죄로 뒤집혔다.

한편 통합진보당 의원 사건과 관련해 함께 재판에 넘겨진 방창현(49·28기) 전 전주지법 부장판사와 심상철(65·11기) 전 서울고등법원장은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가 선고됐다. 

방 부장판사는 법원행정처 요청을 받고 자신이 담당하던 옛 통진당 의원들 사건의 선고와 판결 이유를 누설한 혐의를, 심 전 원장은 옛 통진당 의원들의 행정소송 항소심을 특정 재판부에 배당하도록 부당하게 지시한 혐의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