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호영 복지부 장관 후보자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낙마한 김인철 교육부 장관 후보자. 그래픽=김은교 기자
논란의 공통점은 엘리트의 지대추구적 행위와 지위 대물림 시도다. 지난 정권에서도 내내 논란이 되었던 내로남불과 불공정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번 논란을 기해 진영을 막론하고 이른바 한국의 엘리트 집단이 일반 국민에게 얼마나 ‘비루한’ 존재가 됐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지난 2019년 인사청문회 준비단에 도착해 입장을 밝힌 뒤 엘리베이터에 탔다. 곤혹스런 표정을 짓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혼자 미소짓는 게 우연히 포착됐다.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5/19/deb9513d-54b7-4a3c-9327-b9791a6638fd.jpg)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지난 2019년 인사청문회 준비단에 도착해 입장을 밝힌 뒤 엘리베이터에 탔다. 곤혹스런 표정을 짓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혼자 미소짓는 게 우연히 포착됐다. [중앙포토]
사실 이런 현상은 조국만 겪은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이번 분당갑 보궐선거에 출마한 안철수 국민의힘 후보 역시 한때는 청년들에게 존경받는 멘토이자 스승이었다. 그러나 주요 선거에서 지지층의 요구를 배반하는 과정에서 그런 지위를 상실했다.
존경받는 엘리트의 실종
전통적 의미의 보수라면 조국 전 장관의 추락에 고소해 하기 이전에 이런 냉소가 만연해진 분위기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탈권위도 냉소만큼 깊이 생각해볼 주제다. 윤석열 대통령의 행보는 스스로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사회지도층의 탈권위를 촉진하고 있다. 권위주의 시대에 탈권위는 매력적인 지도자로 보일 수 있지만 지금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를테면 윤 대통령에게는 전직 대통령들처럼 고난과 역경을 극복한 스토리라든지 민주화라는 거대서사가 부재한다. 그의 사법고시 9수 이력은 자수성가형 미담이라기보다는 술 좋아하는 그의 성격과 더불어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같은 곳에서 밈(meme)으로 소비될 법한 유머 요소에 더 가깝다. 취임 첫날부터 경제와 안보정책 방향성보다 대통령 자신이 살 집과 근무처에 대한 화제로 언론이 도배될 만큼 그에겐 ‘큰 이야기’가 없다. 대중이 지도자로서 존경하기 어렵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4일 백화점의 한 매장에서 신발을 신어보고 있다. [사진 독자 제공]](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5/19/bf04eaf8-9dac-49cd-a19b-3c48fc385024.jpg)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4일 백화점의 한 매장에서 신발을 신어보고 있다. [사진 독자 제공]
그런 면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당선과 엘리트의 위상 추락은 상호 연동된 현상일 수 있다. 물론 각계각층의 전문성을 대표하는 엘리트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중 일부는 유튜브나 SNS에서 유명세를 얻기도 한다. 과거와 달라진 건 그들을 소비하는 대중이 더 이상 그들에게서 지적·도덕적 권위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적·도덕적 권위보다는 (거대 미디어 플랫폼의 성장 속에서) 예능적 요소가 주목을 끄는 시대가 됐다. 대상이 아무리 엘리트여도 재밌는 스토리텔링이나 예능적 요소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런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엘리트는 대중의 눈에 그저 비루한 노잼들이다. 위선보다는 차라리 흥미로운 위악이 더 낫다는 여론이 다수를 점한 시대의 풍경이다.
지적·도덕적 권위 대신 예능만 기대
과거엔 대중과 엘리트의 문화적 유대관계의 단절이 이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다. 엘리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자신들이 출세하는 과정에서 지원해준 가족, 지역사회, 더 나아가 민중 전체에 대한 부채감을 의식했다. 좌파는 이를 제도적 재분배로 풀어나가고자 했고, 우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구현을 강조하는 등 방식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사회계층이 굳어진 이후 그러한 상호 간의 유대감이나 부채의식 자체가 문화적으로 생경한 요소가 되어버렸다.
엘리트의 사라진 부채의식
『21세기 자본』으로 유명세를 떨친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오늘날 서구사회 정치를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가 주도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들 모두 대중의 이해를 전혀 대변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그 결과 트럼피즘이나 브렉시트가 나왔다. 어리석은 ‘트럼프 지지자’ 혹은 ‘브렉시트 찬성파’라며 손가락질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것은 서구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진짜 문제는 바로 그렇게 손가락질하는 우리 스스로에게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