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택 특별기고] 위악자 김지하를 위한 변명

생명사상의 선구자 김지하를 추도하며

임진택 마당극 연출가, 창작판소리 명창

임진택 마당극 연출가, 창작판소리 명창

2022년 5월 8일 김지하 시인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49일이 되는 6월 25일, 가까운 지인들이 서울 천도교 대교당에서 김지하 시인을 추모하는 문화제를 만들어 고인의 혼백을 저 세상으로 보내드리는 마지막 재(齋)를 마련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김지하만큼 극과 극의 평가를 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 1970년대 김지하는 빼어난 서정시인이자 파격적인 풍자시인으로,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서있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그는 배신자 혹은 변절자라는 낙인이 찍힌 대표적 인물로 오인되었다. 김지하처럼 영광과 오욕을 동시에 받은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김지하 시인이 세상을 떠난 마당에, 이제 그동안 말할 수 없었던 불편한 진실을 털어놓아야 할 것 같다. 그것도 파격적으로….

김지하 시인은 위악자(僞惡者)였다. 위악자는 내가 만들어낸 신조어(新造語)다. 위선자(僞善者)의 반대말이다. 위선자가 비난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위악자가 비난받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지하가 왜 위악자인지, 왜 더 이상 비난받아서는 안 되는지, 변명해보고자 한다.

선한 사람이면서 ‘목숨 걸고’ 악한 역할 자처했던 위악자
49재 맞아 시인을 기리는 추모 문화제 25일 서울서 열려
40년 전 기후위기·팬데믹 등 대전환 예견한 생명사상가
시인의 인간 변혁에 대한 고뇌와 구도적 일생 경외해야
  
민청학련 사건으로 첫 옥고


저항시인과 생명운동가. 지난 5월 타계한 김지하 시인은 한국 현대사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25일 49재를 맞아 그의 고단했던 여정을 기리는 문화제가 열린다. [중앙포토]

저항시인과 생명운동가. 지난 5월 타계한 김지하 시인은 한국 현대사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25일 49재를 맞아 그의 고단했던 여정을 기리는 문화제가 열린다. [중앙포토]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4호 위반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유신독재 정권은 이 사건에 터무니없는 용공조작을 시도했다. 김지하는 사건에 자신이 연루되자 직감적으로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그것은 자신이 빠져나가려고 하면 할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할 것이며, 무엇보다 남은 학생들이 위험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자신은 물론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심지어는 윤보선 전 대통령까지 끌어들인다. 도저히 빨갱이일 수 없는 저명인사들이 등장함으로써 공안당국의 용공조작은 민망 무색한 꼴이 된다. 그리하여 독재정권은 다음 해 2월 민청학련 사건 구속자들 대부분을 가석방한다. 김지하의 ‘목숨을 건’ 위악적(僞惡的) 지략이 일단 성공한 것이다.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풀려난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중하고 근신했을 법한데, 김지하는 그렇지 않았다. 장모인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정릉 집에 머물고 있던 김지하는 거기에 찾아온 동아일보 이부영 기자(전 국회의원)의 요청으로 옥중수기를 써 내놓은바, 3회에 걸쳐 연재된 ‘고행-1974’의 핵심 내용은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며, 인혁당의 실체는 없다”는 것이었다.

유신 독재자는 노발대발했다. 민청학련을 용공으로 만들기 위해 인혁당 사건을 갖다 붙여놓은 것인데, 인혁당이 조작이면 민청학련도 당연히 조작 아닌가? 하여 유신 독재자는 유언비어(?)의 발설자 김지하를 다시 감옥에 가두었다. 오호, 그로 인해 김지하의 6년 독방 수형 생활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사형선고까지 받고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 사람이면 당연히 ‘착하게’ 살아야 함에도 김지하는 ‘착하게’ 살지 않았다. 지배자의 입장에서 볼 때 김지하는 ‘악한 사람’이었다. 김지하는 선한 사람이면서 악한 역할을 자처한 위악자(僞惡者)였다. ‘목숨을 건’ 위악자였다.

박근혜 지지로 진보로부터 배척

김지하가 민주 진보진영의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판 혹은 비난을 받게 된 계기가 두 번 있었다. 하나가 1991년에 벌어진 소위 ‘죽음의 굿판’ 필화사건이다. 당시 과도한 공안 탄압과 경찰 진압으로 시위 대학생이 맞아 죽거나 자결을 택하던 상황에서 김지하가 “죽음의 굿판” 운운하고 나섬으로써 민주화 운동이 타격을 입게 된 사건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중대한 오해가 개재되어 있다.

먼저 그 칼럼이 실린 조선일보 지면을 제대로 한번 살펴보라. 그 칼럼의 원제목은 분명히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이다. ‘죽음의 굿판 걷어치워라’는 중간 크기의 글자로 된 또 다른 소제목일 뿐, (물론 그같은 내용이 글 안에 들어있다 하더라도) 필자가 원래 정해놓은 그 칼럼의 방향이자 주제는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였다. 그런데 자극적인 소제목이 갑자기 부각되면서 필자의 언설(言說)이 침소봉대(針小棒大)되어 만파(萬波)를 일으킨 것이 바로 ‘죽음의 굿판’ 사건인 것이다. 이 사건은 굳이 그러한 발언을 하지 않아도 충분한 명예를 누리고 있던 김지하가 섬망(譫妄) 중에 저지른 위악적 행위의 자해적 결과였다.

김지하가 민주 진보진영의 사람들로부터 결정적인 비난을 받게 된 또 하나의 빌미가 ‘박근혜 지지’ 사건이다. 당시의 정치평론 중에는 “김지하가 박근혜의 품에 안겼다”는 식의 비유적 표현까지도 떠돌고 있었다. 여기에도 중대한 오해가 개재되어 있다.

김지하는 박근혜의 아버지인 박정희와는 철천지 원수지간이다. 박정희 폭압정권은 김지하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고문했다. 김지하 자신이 황량한 독감방에서 일체의 면회와 운동마저 금지된 상태로 6년을 보냈다. 그러한 김지하가 대선 당시 박근혜의 방문을 받아들인 데는 이유와 조건이 있었다. 하나는 박정희와의 악연을 끊고 국민통합의 길을 모색하자는 것, 또 하나는 생명사상을 정치적으로 실현하자면 여성이(혹은 여성적인 것이) 앞장서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기를 만나려면 배론성지 지학순 주교 묘소를 먼저 참배하고 지난 일을 참회하고 오라는 것 등이었다. 이는 ‘박근혜의 품에 안기는’ 것이 아니라 ‘박근혜까지 품에 안으려는’ 행동이었다고 봄이 옳다. 아마 상대 후보인 문재인이 찾아왔더라도 김지하는 당연히 방식을 달리하여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 사건은 김지하 스스로 후에 자신의 위악적 행동이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술회했으므로 일단락되는 것이 필요하다.

김지하가 세상을 떠나자 대다수의 언론이 그를 ‘저항시인’으로 부각했다. 작품 중에서는 정치풍자 담시(譚詩) ‘오적(五賊)’과, 민주화를 염원한 서정시의 걸작 ‘타는 목마름으로’를 대표작으로 꼽았다. 그 시들이 김 시인의 대표작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김지하를 저항시인으로만 칭하는 것은 그의 세수(歲數) 여든 가운데 전반부 반절에만 해당하는 내용이다. 감옥에서 나온 1980년 이후 김지하는 시인과 더불어 사상가로, 생명운동가로 거듭났다. 그것도 아주 탁월한, 기실 전무후무한 사상가로.

1982년 김지하는 생명사상과 생명운동에 관련한 최초의 보고서를 초안하였다. 이 보고서를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비롯하여 원주캠프의 활동가들이 함께 읽고 토론하여 완성한 것이 바로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라는 문건이다.

‘지하 형님’은 그 문건이 완성되자마자 어느 날 조용히 나에게 그 문건을 보여주었다. “죽음의 먹구름이 온 세계를 뒤덮고 있다”로 시작되는 첫 대목부터 나는 그 문건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앉은 자리에서 바로 탐독(耽讀)했는데, 한참을 기다려주던 지하 형님이 평가(?)를 구하는 것 아닌가?  

나는 글의 내용에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급하게 이렇게 말을 지어냈다. “형님, ‘공산당 선언’ 이후 최고의 선언이 나왔습니다.” “그래?” 지하 형님이 뜻밖이라는 듯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기분은 좋으신 것 같았다. 나는 지하 형님이 더 물어보면 어쩌나 좀 걱정이 되었는데, 사실은 내가 ‘공산당 선언’을 읽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항시인에서 생명운동가로

그 문건은 후에 주요 내용이 재정리되어 김지하의 산문집 『남녘땅 뱃노래』(두레출판사)에 ‘삶의 새로운 이해와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는 바, 기실 오늘날 우리와 전 세계가 겪고 있는 기후위기와 팬데믹을 40년 전에 벌써 예견한 내용이었다.

‘생명의 세계관’의 핵심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부정·극복한 일원론적 세계관을 설파한 것으로, 이는 천동설을 부정한 지동설에 비견할 만한 엄청난 사고의 전환, 문명의 대전환을 예고하는 것임에도 아직 일반화(보편화)되고 있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

이제 충격적인 ‘불편한 진실’을 털어놓아야 할 것 같다.

김지하 시인은 밀폐된 독감방의 외로운 면벽 생활에서 깊은 병을 얻었다. 그것은 정신적인 증상으로, 인간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불치의 천형(天刑)이었다. 감옥에서의 고통스러운 인내와 사유는 한편으로는 섬광(閃光)처럼 생명에 대한 깨달음으로 왔고, 한편으로는 섬망(譫妄)이라는 어두운 그물이 그를 감아 죄었다. 그가 불시에 저지른, 정상을 벗어난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은 대체로 그 섬망 속에서 일어난 일시적 정신 착란과 연관이 있다.

우리는 오히려, 그러한 육체적 고통과 한계 속에서도 처절하리 만큼 치열하게 인간과 사회의 변혁과 완성을 고뇌하고, 지구와 우주 생명에 대한 전 일체적 깨달음에 다다른 김지하의 구도(求道)적 일생을 경외해야 마땅하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남은 우리는 그가 그토록 애타게 알려주고 싶었던 생명의 길, 평화의 길로 이 세상을 지키고 가꾸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임진택 마당극 연출가, 창작판소리 명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