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소음민원, 1000건중 1건도 안되는데…헌재는 한방에 됐다

 헌법재판소가 소음과 사생활 침해를 이유로 헌재소장 공관 앞 삼청로와 등산로 폐쇄를 요구한 것과 관련, 헌재를 비롯해 민원을 즉각 수용한 문화재청에 대해서도 “권위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일반 시민이 관할 지방자치단체에 제기한 소음민원의 경우 소음 원인이 된 공사장 등을 폐쇄하거나 사용금지하는 일이 극히 드물어서다. 시민과 전문가들은 “공정이 시대적 요구가 된 시점에 헌재의 민원만 즉각 수용한 건 권위적인 처사”이라고 비판했다.

서울시, 소음민원 6만건 중 ‘폐쇄·사용금지’는 47건뿐 

5월 청와대 개방에 따라 수십년 만에 열렸다 다시 닫힌 헌법재판소장 공관 인근 삼청로 초입. 등산로 폐쇄를 알리는 문화재청의 현수막과 함께 이에 반대하는 주민 현수막이 같이 걸려있다. [사진 이수민 기자]

5월 청와대 개방에 따라 수십년 만에 열렸다 다시 닫힌 헌법재판소장 공관 인근 삼청로 초입. 등산로 폐쇄를 알리는 문화재청의 현수막과 함께 이에 반대하는 주민 현수막이 같이 걸려있다. [사진 이수민 기자]

27일 서울시의 ‘소음진동관리 연차보고서’를 보면 2020년 서울시에서 제기된 소음 관련 민원은 총 6만386건이었다. 이에 따른 서울시의 처리내용을 보면 ‘사용금지·조업정지’는 40건(0.07%), ‘공사중지·폐쇄 명령’은 7건(0.01%)이었다. 두 유형의 조치를 합쳐도 전체의 0.08%에 불과했다. 민원 처리 중 가장 많은 5만9726건(98.9%)은 ‘기타 이해설득 등’이었다. 헌재소장 공관이 있는 종로구의 경우 소음 민원 2016건 중 폐쇄조치가 내려진 건 ‘0건’이었다.

시민들은 헌재소장의 민원이라 해서 등산로를 즉각 폐쇄한 건 국민 정서에 맞지 않다는 반응이다. 종로구 삼청동에서 50년 이상 거주했다는 주민 권모 씨(68·남)는 “시대가 많이 변하고 있지 않느냐”며 “청와대도 시민들에게 내주고 나간 판국에 ‘길 막아달라’ 요구한 헌재나 민원을 덥석 받아준 문화재청이나 권위적”이라고 비판했다. 현재 헌재소장 공관 진입로 초입에는 “삼청동 북악산 등산로를 주민에게 돌려주세요”, “헌재소장님! 길 좀 열어주세요”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과잉예우 말라” 해도…“헌재 먼저 결정해야 연다”

 
헌재소장 공관 앞 삼청로 폐쇄 논란은 지난 5월 청와대 개방과 함께 시작됐다. 수십 년 만에 한국금융연수원~춘추관 뒷길~백악정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다시 열렸지만, 헌재소장 측은 지난달 소음·사생활 침해 등을 이유로 문화재청에 조치를 요구했다. 문화재청은 청와대 개방 한달이 채 지나지 않은 지난 2일부터 길을 다시 닫았다. 주말 약 3000명에 달하던 등산객들과 주민들을 중심으로 비판 여론이 일었고, 특히 등산로와 함께 폐쇄된 삼청로 초입~공관 앞 삼거리가 헌재소장 공관 소유가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서 논란이 확산했다.  

문화재청의 ‘과잉 조처’ 논란은 앞서 정치권에서도 제기됐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그런 식(헌재 측)의 논리라면 소위 말해 북촌에는 관광객이 골목골목 얼마나 다니는데 다 폐쇄해야 한다는 말”이라며 “헌재 측에선 소장을 과잉예우하지 말라”고 했다. 문화재청은 그러나 “헌재 쪽에서 (먼저) 검토가 되는 게 맞는 순서 같다”고 설명했다. 문화재청 자체 판단으로 등산로를 다시 열기는 어렵다는 취지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24일 현안점검회의에서 "헌재소장에 대한 과잉예우 말라"고 발언했다. 사진은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해수부 공무원 피격사건 진상조사 TF 유족 초청 간담회'에서 모두 발언하는 권 대표. [뉴스1]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24일 현안점검회의에서 "헌재소장에 대한 과잉예우 말라"고 발언했다. 사진은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해수부 공무원 피격사건 진상조사 TF 유족 초청 간담회'에서 모두 발언하는 권 대표. [뉴스1]

헌재, 27일 “문화재청과 공식 협의 시작”

논란이 커지자 관할인 종로구청은 길을 폐쇄한 문화재청과 협의에 들어갔다. 공관 부지를 제외한 삼청로는 등기상 종로구청 소유인 데다 “등산로를 열어달라”는 주민들의 민원을 무시할 수 없어서다. 종로구청 관계자는 “지속해서 민원을 제기하는 주민분들이 있으셔서 이른 시일 내에 해결하고 싶은데 문화재청이 아직 꿈쩍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헌재 측도 이날 등산로 폐쇄 논란과 관련한 회의를 열고 입장을 냈다. 헌재는 “등산로 개방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 문화재청과 공식 협의를 시작했다”며 “논란을 종식할 수 있도록 등산로 관리 방안, 관리 주체 등 세부사항에 대해 조속한 시일 내에 결정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헌재 측은 사흘 전인 지난 24일 “문제가 된 등산로는 헌재가 일방적으로 폐쇄한 것이 아니며, 시민들을 불편하게 할 의도가 없었다”고 해명한 바 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의 권위주의적 관성을 내려놓고 대국민 소통을 강화하자는 데 청와대 개방의 큰 방향성이 있다”며 “사법부가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하는데 오히려 파열음이 나고 있다”고 말했다. 구 교수는 이어 “투명성이 대세인 현시점에서 길을 닫아야 할 근거도 없는데 버티는 건 국민 정서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5월 청와대 개방 이후 헌법재판소장 공관 인근의 삼청로 초입 모습(좌측)과 지난 25일(토요일) 삼청로 초입의 모습 비교. 한양도성 안내 부스가 없어지고 치워져있던 바리케이트와 현수막이 길에 자리했다. [네이버지도ㆍ이수민 기자]

지난 5월 청와대 개방 이후 헌법재판소장 공관 인근의 삼청로 초입 모습(좌측)과 지난 25일(토요일) 삼청로 초입의 모습 비교. 한양도성 안내 부스가 없어지고 치워져있던 바리케이트와 현수막이 길에 자리했다. [네이버지도ㆍ이수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