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아이들이 외쳤다 "와! 강남 온거 같네"…이 세련된 공간

남양주시에 새로 지어진 청소년 전용 공간 '펀그라운드 진접'의 내부. 청소년이라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사진 진효숙 작가]

남양주시에 새로 지어진 청소년 전용 공간 '펀그라운드 진접'의 내부. 청소년이라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사진 진효숙 작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는 남양주의 대표적인 구도심이다. 인근에 3기 신도시인 남양주 왕숙 지구가 들어선다. 신도시와 대조적으로 진접은 그대로 낡아가는 것이 숙명이 된 동네다. 오일장이 열리고, 구도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크랜드’ 옷가게와 ‘트라이’ 속옷가게가 있는 이 오래된 동네에 최근 반짝이는 새 건물이 들어섰다. 그런데 건물 입구에 적힌 이용 가능한 연령대가 무척 낯설다. ‘청소년만 입장 가능.’

 
지난 6월 문을 연 ‘펀그라운드 진접’의 모습이다. 그동안 PC방과 상대적으로 저렴한 대용량 커피 프랜차이즈점을 전전하던 아이들이 그들만을 위해 설계된 공간을 처음 만난 날의 일성은 이랬다. “와, 강남에 온 것 같아요.” 진접의 청소년들에게 반짝이고 세련된 느낌의, 이를테면 강남 같은 아지트가 생긴 것이다. 

펀그라운드 진접의 외관. 거친 콘크리트와 날렵한 알루미늄 패널이 대비된다. [사진 진효숙 작가]

펀그라운드 진접의 외관. 거친 콘크리트와 날렵한 알루미늄 패널이 대비된다. [사진 진효숙 작가]

이곳 뿐 아니라 서울 강남구의 한 재건축 아파트 단지에는 초등학생들을 위한 전용 쉼터가 생겼다. 강남구가 재건축 조합으로부터 기부받아 운영하는 키움 센터다. 이 공간 덕에 맞벌이 가정의 아이들은 방과 후 학교에 머물지 않고 방과 후 동네에서 논다. 골목길 놀이 문화가 사라지고 아파트 단지가 아니면 놀이터도 찾기 어려운 요즘, 아이들은 어디서 쉬고 놀아야 할까? 도시에서 늘 소외되기만 했던 아이들을 위해, 특별한 공간 처방을 한 두 곳의 이야기를 전한다.  

대강당도 회의실도 없는 청소년 공간

펀그라운드 진접(펀그라운드)은 옛날 읍사무소 자리에 들어섰다. 주변에 학교만 10여개인데 아이들이 편히 머물 공간은 없는 동네였다. 펀그라운드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광동중학교에 다니는 이주현(14) 양은 쉴 틈이 생기면 주로 카페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주말에는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 스티커 사진을 찍고 역시나 카페로 갔다. 펀그라운드가 생긴 이후 부모님에게 허투루 돈을 쓴다고 핀잔듣기도 했던 카페 방문을 안 하게 됐다. 이 양은 “카페에서는 뭔가 사야만 쉴 수 있는데 펀그라운드에서는 돈 낼 필요 없이 편하게 쉬면서 친구들을 만나 보드게임도 할 수 있고, 자리마다 콘센트가 있어서 인터넷 강의 보기도 좋다”고 말했다.  

남양주시는 제안공모전을 통해 2020년 건물을 설계할 건축가를 뽑았다. 제안 공모는 완성된 안을 제출하는 방식이 아니라, 건축가가 낸 아이디어를 보고 선발한 뒤 실제 설계안을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공모전에 당선된 신호섭 건축가(건축사사무소 신 공동대표)는 “아이들에게 뭘 해주지도 않으면서 잘못했다고만 지적하는 어른이 더는 되지 말고, 청소년들이 존중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청소년만을 위한 전용 공간을 만들자고 남양주시와 의기투합했다”고 말했다.  


펀그라운드 진접 1층의 모습. 건축가는 대강당을 없애는 대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사진 진효숙 작가]

펀그라운드 진접 1층의 모습. 건축가는 대강당을 없애는 대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사진 진효숙 작가]

공간이 완성도 높게 지어진 것은 건축주(발주처)와 건축가, 시공사 간의 삼합이 잘 맞아 떨어진 덕이다. 펀그라운드에는 공간을 설계할 때부터 운영팀이 정해져 있었다. 통상 공공 건축물의 경우 다 지은 뒤에야 운영할 팀을 뽑아 공간과 실제 운영이 겉도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펀그라운드는 발주처인 남양주도시공사 내에 있는 청소년지도사팀이 직접 운영한다. 신 소장은 “설계 단계에서 협의를 거칠수록 오히려 기존 청소년 공간의 틀을 깨는, 혁신적인 안으로 바뀌게 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실제 사용자가 될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디자인워크숍도 수차례 열었다. 아이들의 요구는 간명했다. “재밌고, 다양한 활동을 했으면 좋겠고, 강의실은 싫어요.”  

펀그라운드 진접에는 청소년 시설이라면 흔히 있는 대강당이나 어학실처럼 기능이 정해진 실이 없다. 4층에 있는 강의실 두 곳과 실내 가운데에 있는 기둥을 빼면 고정된 것은 없다. 새로운 도전이다. 바뀌는 트렌드에 맞춰 필요에 따라 공간을 유연하게 바꿔 쓸 수 있다. 1층의 절반이 2층까지 탁 트여 있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좌석이 된다. 계단 앞에 스크린을 펼치면 영화관이 되고, 공연하면 관람석이 된다. 2층에 놓인 소파마저도 이래저래 변형시켜 앉기 좋은 형태다.  

17개의 아지트에서 자라나는 상상력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많은 공간은 3층이다. 원통형의 아지트 공간이 실내에 17개가 있다. 공간마다 모양이 다른데 어떤 원통 공간의 경우 내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천창 너머 하늘을 볼 수 있다. 선인장 위로 그물이 쳐진 곳도 있는데 비 오는 날에 그물 위에 누워 있으면 천창으로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감상할 수 있다. 신호섭 소장은 “펀그라운드라는 글씨체도 그래픽 디자이너에 맡겨 마치 아이들끼리만 통하는 암호처럼 보이게 디자인했다”며 “아이들을 위해 온전히 신경 쓴 공간이고, 딱딱한 학교를 벗어나서 무엇이든 해도 되고 또 안 해도 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랐다”고 전했다.  

 

펀그라운드 진접 3층에서 한 청소년이 쉬고 있다. [사진 건축사사무소 신]

펀그라운드 진접 3층에서 한 청소년이 쉬고 있다. [사진 건축사사무소 신]

선인장 위에 설치된 그물 공간. 누우면 하늘이 보인다. [사진 진효숙 작가]

선인장 위에 설치된 그물 공간. 누우면 하늘이 보인다. [사진 진효숙 작가]

이런 어른들의 의지를 설명해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펀그라운드에 들어서는 순간 공간의 존재 이유를 바로 안다. 1층 내부에 자전거와 스케이트보드 거치대가 있고, 자전거를 타고 들어와도 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건물에 들어선 아이들은 일단 뛴다. 탁 트인 개방감에 해방감을 느끼면서다. 김효진 펀그라운드 진접 센터장(청소년 지도사)은 “아이들의 기분을 억지로 누르려고만 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만큼 절충안을 찾고 있다”며 “아이들과 논의한 결과 1층에 미니 탁구대나 펌프 게임기, 뒷마당에는 배드민턴 대를 설치해 에너지를 충분히 발산시킬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펀그라운드에는 청소년 운영위원회가 있다. 15명의 청소년 위원과 청소년 지도사들이 협의해 공간을 운영한다. 김 센터장은 “청소년 전용 공간인 만큼 공간 주도권도 아이들에게 주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남양주시에는 진접을 포함해 펀그라운드라는 명칭을 단 청소년 전용 공간이 네 곳이나 있다. 실험적인 공간과 콘텐트 운영은 벌써 입소문이 나 장학사를 비롯한 교육계의 현장방문이 줄 잇고 있다. 이런 공간 경험을 쌓은 아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성장하게 될지 기대된다.    

펀그라운드 퇴계원의 모습. 오랫동안 비어 있던 파출소 건물이 청소년 전용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사진 진효숙 작가]

펀그라운드 퇴계원의 모습. 오랫동안 비어 있던 파출소 건물이 청소년 전용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사진 진효숙 작가]

맞벌이 가정의 아이, 동네가 보살핀다면  

지난 3월 서울 강남구 일원동 디에이치개포자이 단지 안에는 초등학생을 위한 ‘누리봄 다함께 키움센터’(전용면적 686㎡)가 문을 열었다. 강남구가 기부채납 받아 운영하는 공간으로 평일에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 방학 때는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문 연다. 맞벌이하는 강남구민의 자녀이거나 강남구의 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면 월 5만원만 내면 이용할 수 있다. 한 달에 최대 일곱번가량 긴급돌봄 신청도 할 수 있다. 긴급돌봄의 경우 하루 2500원만 내면 점심, 저녁도 준다. 방과 후에도 갈 곳이 마땅치 않아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던 아이들이 방과 후 동네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다.

 
공간을 디자인한 전이서 건축가(전 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 대표)는 처음 기부채납 받았을 당시 복도와 방으로만 구성됐던 공간을 다 틔웠다. 건축가는 아파트에서 태어나 다른 형태의 공간에 대한 경험이 없는 아이들을 위해 작은 집과 구름방, 캠프방 등 아이들에 맞춰 스케일이 작으면서 높낮이가 다른 입체적인 공간을 만들었다. 전이서 소장은 “굳이 정적인 공간과 동적인 공간으로 경계를 나누지 않고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놀다가 옆의 계단 도서관으로 쏙 들어가 책도 보고 누울 수 있게, 사용자인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공간을 쓸 수 있게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서울 강남구 일원동 디에이치자이개포 단지 내 자리한 키움센터. 강남구가 기부채납 받아 운영한다. [사진 이남선 작가, 전아키텍츠]

서울 강남구 일원동 디에이치자이개포 단지 내 자리한 키움센터. 강남구가 기부채납 받아 운영한다. [사진 이남선 작가, 전아키텍츠]

40명 정원인 이 공간은 입소문이 나 이미 꽉 찼고, 30명이 대기하고 있다. 서울시는 이런 키움 센터를 지난달 말 기준으로 218곳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가 전용 80㎡ 이하 규모이고, ‘누리봄 다함께 키움센터’처럼 큰 곳은 드물다. 대규모 재건축 단지에서 기부채납을 받았기에 가능한 공간이었다. 인디언 속담에는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부모가 얼마만큼의 학력과 재력을 가졌는지에 상관없이 모든 아이가 편히 놀고 쉬고 배울 수 있는 공공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야말로 공공이 해야 할 공간 복지가 아닐까 싶다.  

 

한은화의 공간탐구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