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국 ‘달러 탈출’…연쇄 금융위기 비상

‘거인의 발걸음’에 신흥국 시장에서 외국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공격적인 기준금리 인상과 경기 침체 공포가 작용한 결과다.

국제금융협회(IIF) 통계에 따르면 신흥국 시장에서 지난 3월 이후 5개월 연속 자본 순 유출이 이어져 393억 달러(약 51조원)가 빠져나갔다. 2005년 통계를 처음 집계한 이후 최장 기간이다.

JP모건 집계에서도 올해 초~지난달 말 전 세계 투자자가 신흥국의 외국환 표시 채권 펀드에서 300억 달러(39조원)의 자금을 회수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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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만 해도 분위기는 달랐다. 신흥국 자본시장에 지난 1월엔 107억 달러(13조9000억원), 2월엔 111억 달러(14조4000억원)의 외국 자본이 순유입됐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해 말과 올 초엔 투자자들이 신흥국에서 코로나19 유행이 끝나고, 강력한 회복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했다”며 “하지만 세계적인 인플레에 중국 경제 성장이 둔화하자 많은 투자자가 신흥국에서 손을 떼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정학적 갈등도 일조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격해지자 안전자산을 선호하는 심리가 확산했다. IIF에 따르면 지난달 중국 채권시장에선 30억 달러(약 3조9000억원)가 빠져나갔다. 로이터는 지난 4일 “낸시 펠로시 미 하원 의장의 대만 방문으로 중국과 주변국 자본 시장의 긴장이 더 고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흥국 경제에는 이미 빨간 불이 켜졌다. 올해 들어 지난달 말까지 미국 달러 대비 스리랑카 루피 가치는 43.8%, 파키스탄 루피는 25.5%, 방글라데시 타카는 9.1%, 인도 루피는 6.3% 각각 하락했다.

이들 국가가 외화로 지급해야 하는 국채 상환 부담은 더 커진다. 지난 3개월 동안 스리랑카는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했다.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도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과 차관을 요청했다. 블룸버그는 지난 4일 “남아시아 국가들은 지난 10년간 낮은 비용으로 달러 등 외화를 조달해 파티를 즐겼다”며 “이들 국가의 부채 문제는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속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치솟는 연료 가격은 신흥국 경제를 더 깊은 늪에 빠뜨리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파키스탄 정부는 IMF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경유 가격을 100%, 전기 가격을 50% 인상했다. 7일 방글라데시 매체와 외신에 따르면 방글라데시 정부도 지난 6일부터 휘발유와 경유의 가격을 각각 51.2%와 42.5% 한 번에 인상했다. 이들 국가에선 반발로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성장률 둔화도 피할 수 없다. 세계은행(World Bank)은 지난 6월 “개발도상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이전의 4.6%에서 3.4%로 하향 조정한다”고 발표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신흥국의 경제 성장 둔화가 내년 세계 경제에 역풍을 가중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레베카 그린스펀 유엔무역개발회의 사무총장은 지난 6월 “신흥국 부채 위기가 도미노가 될 가능성은 코로나19 유행 때보다 지금이 더 크다”고 경고했다.

한국도 안심할 수 없다. 블룸버그는 “외국인은 올해 2분기 대만 주식시장에서 170억 달러, 한국서 96억 달러를 순매도했다”며 “기술 집약 산업 중심인 한국과 대만에서도 더 큰 자본 유출이 진행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도 원화 약세가 이어지고 수입 물가가 올라 무역수지가 악화하면 국채 시장에서 자본이 빠져나가는 등 자본 유출이 심각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위기 진정의 키는 미 Fed가 쥐고 있다. IIF는 “지난달 27일 제롬 파월 미 Fed 의장이 금리 인상 속도를 늦출 수 있다고 말한 뒤 지난달 말 신흥국의 일일 자본 흐름이 개선됐다”며 “다음 달엔 순 유입으로 전환할 가능성도 생겼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