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의견서'에 피해자 측 '준비서면' 맞대응…꼬이는 ‘강제징용’ 해법

양금덕 할머니는 지난달 27일 기자회견을 열고 외교부가 '외교적 노력'을 강조하는 내용의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한 것을 비판했다. [뉴스1]

양금덕 할머니는 지난달 27일 기자회견을 열고 외교부가 '외교적 노력'을 강조하는 내용의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한 것을 비판했다. [뉴스1]

한·일 관계 개선을 앞세워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을 마련 중인 정부와 피해자 간 내홍이 깊어지고 있다. 2018년 대법원 판결에서 승소한 양금덕·김성주 할머니 측 법률 대리인이 최근 현금화 요청을 심리중인 재판부에 조속한 절차 이행을 요청하는 준비 서면을 제출하면서다.

피해자 대리인이이 제출한 준비 서면엔 미쓰비시중공업의 국내 자산(특허권·상표권)에 대한 현금화 조치를 둘러싼 신속한 결론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한·일 양국은 앞서 정상 간 친서 교환 및 한·일 외교장관 회담 등을 통해 현금화 조치를 ‘레드라인’으로 설정했지만, 정작 피해자 측에선 신속한 현금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강조한 것이다.

2018년 11월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승소한 강제징용 피해자 측이 기자회견을 열고 환호하는 모습. 하지만 미쓰비시는 이후 4년간 국내 사법부 판결을 외면하며 배상을 이행하지 않았고, 윤석열 정부는 강제징용 문제의 외교적 해법을 마련하기 위해 민관협의회를 발족했다. [연합뉴스]

2018년 11월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승소한 강제징용 피해자 측이 기자회견을 열고 환호하는 모습. 하지만 미쓰비시는 이후 4년간 국내 사법부 판결을 외면하며 배상을 이행하지 않았고, 윤석열 정부는 강제징용 문제의 외교적 해법을 마련하기 위해 민관협의회를 발족했다. [연합뉴스]

강제징용 피해자인 양금덕·김성주 할머니는 2018년 11월 강제징용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피고인 미쓰비시중공업은 국내 사법부 판결을 외면했다. 이에 미쓰비시중공업의 국내 자산을 강제로 매각해 현금화한 뒤 배상금에 활용해달라고 법원에 요청한 상태다. 대법원은 관련 요청에 대해 더 이상 심리할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하면 사건 접수 4개월이 되는 오는 19일까지 심리불속행 기각 판결을 내려야 한다.

강제징용 피해자 측의 준비 서면은 사실상 지난달 외교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이 대법원에 각각 제출한 의견서 내용을 반박하는 맞대응에 해당한다. 외교부는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 마련을 위한 외교적 협의가 진행중이란 내용을, 미쓰비시중공업은 민관협의회를 통해 해결 방안이 마련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견서에 담았다. 이는 민관협의회 등 행정부 차원의 문제 해결 프로세스를 존중해달라는 ‘사법 자제’ 요청으로, 현금화 조치에 대한 우회적인 동결 요구로 풀이된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의 법률 대리인인 임재성 변호사는 지난 3일 외교부의 의견서 제출에 항의하며 민관협의회에 불참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뉴스1]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의 법률 대리인인 임재성 변호사는 지난 3일 외교부의 의견서 제출에 항의하며 민관협의회에 불참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뉴스1]

반면 민관협의회 불참을 선언한 강제징용 피해자 측은 외교부가 아무런 상의 없이 사실상의 현금화 동결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제출하며 신뢰가 깨졌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지난 3일 기자회견을 통해 “정부가 대법원에 '판단을 유보하라'는 취지로 의견서를 제출했다고 판단한다. 이는 헌법이 보장한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며 “절차적으로 피해자 측과의 신뢰관계를 완전히 저버리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2018년 승소한 대법원 판결의 원고이자 현금화 요청 당사자인 양금덕·김성주 할머니 측도 정부의 외교적 해법을 기다릴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대법원 판결 이후 약 4년의 시간이 흐른 만큼 언제, 어떤 내용이 담길지 모르는 정부 해법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사법적 판단을 우선시하겠다는 취지다.

이와 관련 양금덕·김성주 할머니를 지원하고 있는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대표는 “정부는 민관협의회를 통한 해법 마련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현금화를 요청한 당사자인 피해자 측은 민관협의회에 참여하지 않은 만큼 현금화와 민관협의회 절차는 별개로 다뤄져야 한다”며 “2018년 대법원 판결 이후 4년이 지나는 동안 문제 해결은커녕 상황이 점차 악화하고 있는 만큼 현금화 조치라는 사법적 판단을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