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섬과 협력이 인구 대책?… 희한한 지방소멸기금 1조

8월 말 기준 강원도 태백시 인구는 3만9940명으로 ‘4만명 선’이 무너졌다. 2012년 인구 5만명이 붕괴한 지 10년 만이다. 1980년대 중반 11만명에 달했던 인구가 급속도로 줄어들자 정부와 강원도, 태백시가 각종 대책을 내놨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태백에선 동(洞) 지역인데도 인구가 2000명을 밑돌아 병원은 고사하고 약국이 없는 곳도 있다.

류임철 행정안전부 지방자치인재개발원 원장(왼쪽 일곱번째)이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호텔에서 열린 '2022년 지방의회 아카데미'에서 지방의원 참석자들과 기념 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류임철 행정안전부 지방자치인재개발원 원장(왼쪽 일곱번째)이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호텔에서 열린 '2022년 지방의회 아카데미'에서 지방의원 참석자들과 기념 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정이 이렇자 정부가 ‘지방소멸대응기금’으로 올해와 내년 태백시에 220억원을 지원한다. 태백시는 이 기금을 공공산후조리원, 문화복지·산림치유센터가 더해진 복합힐링센터 등을 짓는데 쓸 예정이다. 하지만 인구 4만명을 다시 회복할지는 미지수다. 외부 인구를 유입시킬 기업 유치나 공공기관 이전도 여의치 않고 교육 인프라도 열악해서다.

태백시, 기금 200억원 힐링센터 건립 등에 사용 

이상호 태백시장은 “어렵게 지켜온 인구 4만명이 무너졌다. 태백은 지금 최대 위기”라면서도 “기금으로 각종 시설을 만들어 전지훈련이나 스포츠대회를 유치하면 인구 유입에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방소멸대응기금 실효성에 벌써 의문이 제기된다. 인구유입에 필요한 중장기적 사업보단 단발성, 중복 사업에 기금이 대부분 활용되면서다. 

지난해 10월 18일 행정안전부가 전국 89개 시·군·구를 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 고시했다. 충남에서는 공주와 논산, 보령, 부여, 청양 등 9곳이 인구감소지역에 포함됐다. 사진은 충남 공주의 구시가지 모습. 연합뉴스

지난해 10월 18일 행정안전부가 전국 89개 시·군·구를 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 고시했다. 충남에서는 공주와 논산, 보령, 부여, 청양 등 9곳이 인구감소지역에 포함됐다. 사진은 충남 공주의 구시가지 모습. 연합뉴스

15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올해 처음 ‘지방소멸대응기금’을 신설했다. 인구 감소지역으로 분류된 기초지자체 89곳과 관심지자체 18곳, 서울·세종을 뺀 15개 광역지자체 등 모두 122곳에 매년 1조원씩 10년간 지원할 계획이다. 지난달 16일 122곳의 배분금액이 결정됐다.


올해는 제도 도입 첫해로 2년 치 기금 1조7500억원(7500억원+1조원)을 배분한다. 행안부는 자치단체가 제출한 사업계획서에 따라 등급(A~E)을 나눠 금액별 차등을 뒀다. 인구감소 지역(89곳)에는 최소 112억원에서 최대 210억원, 관심 지역(18곳)에는 28억~53억원을 각각 지원한다. 관심 지역은 조만간 인구감소지역에 포함될 가능성이 큰 곳이다.

행안부, 지난달 16일 등급 따라 차등 결정

이 가운데 충남 금산과 경북 의성, 전남 신안, 경남 함양 등 4개 군(郡)이 인구감소 지역 가운데 A등급으로 꼽혀 가장 많은 기금을 받게 됐다. 충남 금산군은 마을 내 유휴시설을 리모델링한 뒤 숙박시설로 전환하고 산림욕 체험과 유입 인구를 대상으로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는 사업계획서로 A등급을 받았다. 

전남 신안군은 ‘섬 살이 교육전문센터 로빈슨 크루소 대학 구축’이라는 사업계획을 제출했다. 폐교를 활용해 교육시설을 만들고 태평양 도서국(섬나라) 등 국제협력 강화하겠다는 게 사업의 핵심이다.

지난 7월 28일 이지연 통계청 인구총조사과장이 정부세종청사에서 등록센서스 방식으로 집계된 2021년 인구주택 총조사 전수집계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뉴스1

지난 7월 28일 이지연 통계청 인구총조사과장이 정부세종청사에서 등록센서스 방식으로 집계된 2021년 인구주택 총조사 전수집계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뉴스1

하지만 기금 대부분이 특정 분야에 집중된 데다 차등 지급이 오히려 자치단체 간 과열경쟁을 불러온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더구나 올해는 각 자치단체가 사업계획을 세우는 기간이 2~3개월에 불과했고, 중장기적 사업보다 단발성, 중복 사업이 많았다는 것도 한계로 들었다. 올해 사업 공고는 1월, 세부 계획안은 3월에 확정되면서 자치단체들은 “사업 타당성을 검토할 시간이 부족했다”고 입을 모았다.

대부분 생활인프라 개선 

실제 자치단체가 제출한 투자 계획서를 보면 생활 인프라 개선이 대부분이고 전체 사업 가운데 70% 이상이 문화와 관광 등 ‘유동인구’를 위한 분야에 집중됐다. 각종 스포츠센터나 문화센터를 건립하겠다는 내용도 대부분의 자치단체가 내세운 계획이다. 이 때문에 자치단체별로 특성을 살리지 못했고, 정부 기금이 인구 소멸을 막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행안부가 ‘기금 사업 우수 사례’로 든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광주 동구는 ‘충장상상큐브 조성 및 운영’이라는 사업 계획을 제출하면서 골목 야시장을 조성하고 단편 영화제를 개최하겠다며 기금을 요청했다. 충북 괴산군은 귀촌 희망 청년층을 대상으로 맞춤형 창업 공간을 만들고 교육 기회도 제공하겠다는 계획으로 기금을 지원받게 됐다. 다른 자치단체 사업과 큰 차이가 없는 내용이다.

15일 교육부 방침에 따라 전국 96개 일반대와 전문대는 '적정규모화 계획'에 따라 2025년까지 입학 정원을 1만6197명 감축하게 된다. 이날 고려대학교에서 학생들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뉴스1

15일 교육부 방침에 따라 전국 96개 일반대와 전문대는 '적정규모화 계획'에 따라 2025년까지 입학 정원을 1만6197명 감축하게 된다. 이날 고려대학교에서 학생들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뉴스1

 
행안부는 “한국지방재정공제회에서 위촉한 평가단에서 사업의 우수성, 계획의 연계성, 추진체계의 적절성 등 기준에 따라 투자계획을 객관적으로 평가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 "실효성 있는 정책 중심으로 지원해야"

반면 전문가들은 지방소멸대응기금이 실제로 지방소멸을 막는 마중물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사업계획서 평가’로 기금을 배분할 게 아니라 실효성 있는 정책을 중심으로 지원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부가 규모의 경제에 따른 효과적 지역 살리기가 아닌 자치단체나 지역의 민원을 우려, 쪼개기 방식으로 분배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배재대 행정학과 최호택 교수는 “각 도시와 지방마다 특색이 있고 역사와 전통이 다르기 때문에 비슷한 사업으로는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며 “자치단체 간 과열경쟁을 예방하고 기금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평가 기준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인구소멸 위험이 수도권까지 확산한 가운데 지난 4월 6일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 빈 집의 모습. 연합뉴스

인구소멸 위험이 수도권까지 확산한 가운데 지난 4월 6일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 빈 집의 모습. 연합뉴스

 
행정안전부는 지방소멸대응기금 성과를 분석한 뒤 중장기적 후속 조치로 맞춤형 컨설팅과 성공·실패 사례 공유 시스템을 마련할 방침이다. 인구감소 지역 자치단체는 앞으로 매년 초 인구 소멸 대응 기본계획을 마련, 정부에 제출해야 한다. 정부는 이들의 재정수요를 지방교부세 등에 반영할 계획이다.

행안부 관계자는 “앞으로 중장기 계획과 각종 특례가 지방소멸대응기금 사업과 긴밀이 연계되도록 하겠다”며 “법에서 최초로 도입한 생활인구의 요건을 추가로 연구, 인구 감소 대응을 위한 다양한 정책에 활용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