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야 꺼낸 초유의 '단독 예산안 처리'…"헌법 원칙 흔들린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더불어민주당이 내년도 예산안의 ‘수정안 단독 처리’ 카드를 꺼내면서 정치권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으로 빠져들었다. 과거에 여당이 예산안을 강행 처리한 적은 여러 번 있었으나, 야당이 자체 수정안을 밀어붙이는 건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다.

 
이재명 대표는 29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정부·여당이 예산안 처리를 위해 전혀 바쁜 기색도 없고 다급함도 보이지 않고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것 같다”며 “오히려 ‘오로지 정부 원안에 대한 가부 표결을 통해 처리가 불발되면 준예산으로 가자’는 태도를 보이는데 결코 용인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표는 전날에도 “옳지 않은 예산을 삭감한 민주당의 수정안을 선택하는 것도 하나의 안”이라며 야당 수정안 단독처리 가능성을 내비쳤다.

이 대표가 꺼내 든 ‘민주당 수정안’ 전략은 다음 달 2일 본회의에 자동 부의되는 정부 원안을 부결시키고, ‘대통령실 이전’, ‘경찰국 신설’ 예산 등을 대거 칼질한 민주당 자체 감액안을 처리하겠다는 뜻이다. 정부 동의 없이 국회에서 예산 증액은 불가능하지만, 감액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국회법은 50인 이상 국회의원이 예산안 수정안을 낼 수 있도록 해, 169석의 민주당은 단독으로도 감액안을 발의·의결할 수 있다. 예산안은 법률안이 아니어서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없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28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박홍근 원내대표와 논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28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박홍근 원내대표와 논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당이 이런 초강수를 두는 건, ‘윤석열표’ 예산을 덜어낸 자리에, ‘이재명표’ 복지 예산을 밀어 넣기 위해서다. 단독 처리 카드를 고리로 정부·여당을 압박해, ▶기초연금 부부 감액 폐지 ▶노인 일자리 예산 등 이재명표 증액 예산에 대한 합의를 끌어낸다는 데 1차 목표가 있다.  


다만 합의가 불발될 경우, 민주당은 우선 감액안을 단독 의결한 뒤 내년도 상반기 추가경정예산안 편성을 요구해 증액안을 마저 끼워 넣겠다는 계산이다. 원내 핵심 관계자는 “정부 예산안에서 확 감액이 이뤄지면, 세입에서 생기는 잉여금으로 추경안을 짜면 된다”며 “정부·여당도 자신들의 필요로 추경을 편성할 수밖에 없을 테니, 그때 이재명표 복지 예산에 대한 협상을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에 이재명표 복지 예산을 원포인트로 수용할 것이냐, 아니면 감액안 통과 뒤 추경을 통해 ‘투스텝’으로 받아들일 건지는 국민의힘에 달린 일”이라고 덧붙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7월 7일 오전 충북 청주시 충북대학교에서 새정부 5년간의 국가재정운용방향을 논의하는 2022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7월 7일 오전 충북 청주시 충북대학교에서 새정부 5년간의 국가재정운용방향을 논의하는 2022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연합뉴스

 
그러나 이런 민주당 방침은 윤석열 정부의 ‘원칙적 추경 금지’ 방침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와 달리 원칙적으로 추경을 하지 않는 ‘건전재정’ 방침”이라며 “게다가 추경은 정부가 편성하는 건데, 야당이 본예산 통과도 전에 추경을 운운하는 건 난센스”라고 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도 “추경은 요건이 충족돼야 하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추경 편성이 가능할지도 확실치 않은데 그걸 예상하고 감액만 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만약 민주당이 정부안을 임의로 감액할 경우 세입과 세출 균형이 깨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정부 관계자는 이날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민주당 시나리오대로 진행되면 ‘세출=세입’ 균형이 깨져, 일국의 예산이 기형적으로 변하는 상황이 된다”며 “1년 뒤 결산 국회에서 야당이 온전히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민주당의 단독 예산안 처리는 헌법 원칙에 위배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가 예산 편성권을 갖고, 국회는 이를 심의·확정하는 게 제헌헌법 이래 대한민국 헌법의 확고한 원칙이기 때문이다. 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는 “국회에 예산 심의 확정권을 부여한 것은 견제와 감시의 의미지, 멋대로 감액한 뒤 증액안을 끼워 넣으라는 취지가 아니다”고 비판했다. 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 교수(헌법학)도 “야당이 예산을 편성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헌법 원칙을 뒤흔드는 것”이라며 “더구나 대통령 취임 첫해 예산안인데, 대통령을 뽑은 다수의 국민 뜻을 무시하는 것”이라 질타했다.

 

28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예산안등조정소위원회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국무조정실 등 정무위 소관 예산안을 심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28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예산안등조정소위원회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국무조정실 등 정무위 소관 예산안을 심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만 민주당이 이런 계획을 끝내 결행할지는 미지수다. 2024년 22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개별 의원들로선 지역 예산 챙기기가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호남권 초선 의원은 “지도부로선 이재명 대표 예산을 지키기 위해 예산안 단독처리까지 고려하지만, 개별 의원들로선 자신의 당선을 위해 지역을 챙겨야 한다는 바람이 크다”며 “조금이라도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여야 합의로 처리하고 실익을 챙기자는 목소리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원내 관계자는 “최종적으로 국민의힘이 대통령실 관련 예산을 삭감하고 이재명표 예산을 수용하는 등 타협에 나서면 우리로선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