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갔나 세지도 않는다"…임기말 김명수호 판사 줄사표

“이젠 누가 나가는지 굳이 세어보지도 않아요.”“출근 준비할 때마다 문득 나도 그만둬야 하나 싶어 싱숭생숭해요.” 
법관 생활 20년이 넘은 판사들이 최근 이런 이야기를 한다. 27일 고위법관 인사가 예정된 가운데 몇 달 전부터 법원은 사표 행렬에 뒤숭숭하다. 

전국의 모든 사건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대법원 재판연구관의 연이은 사표가 특히 충격적이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5년 경력에 속초지원장을 역임한 신원일 부장판사(사법연수원 32기)는 김앤장법률사무소로 옮긴다. 조세·노동 등 특정 분야를 담당하는 총괄 재판연구관 2명도 사의를 표했다.

법원의 허리격인 고등법원 판사의 경우도 비슷한 상황이다. 지난해 전국 고법 판사 13명이 법복을 벗으면서 ‘엑소더스’ 신호탄을 쐈는데, 올해는 서울고법에서만 판사 13명이 사표를 냈다. 수원고법에서도 1명이 사표를 내 수도권에서만 벌써 지난해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번에 사표를 낸 서울고법 판사 명단에는 이른바 ‘꽃길’이 예정됐던 판사들이 대거 포함된 것이 특징이다. 박재영(30기), 정수진(32기), 노재호·최웅영(33기), 김영진(35기) 판사 등이 대형 로펌행을 결정했다. 이들은 법원행정처에서 사법행정을 경험하거나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지내며 커리어를 쌓아, 예전 같으면 고법 부장 승진을 바라봤을 판사들이라는 게 법원 내 평가다.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 부부의 이혼 사건을 심리한 김현정(30기)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도 사표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에 연루됐다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 무죄가 확정된 성창호(25기) 서울남부지법 부장판사도 법무법인 광장으로 옮긴다.


 

“쳇바퀴 도는 일상”…판사들도 지친다

 
우수 인력이 법정 밖으로 향하는 것은 사법부의 큰 고민거리가 됐다. 판사들은 주요 원인을 ‘업무 동기부여 부족’으로 진단한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제도가 없어져 성과를 인정받을 길이 없어진 상황에서, 정년까지 박봉을 받으며 쳇바퀴 돌 듯 재판만 해야 한다는 게 막막하다고 토로한다. 사법부 관료화를 막기 위해 고법 부장을 없앤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대신 판사들이 오래 일할 수 있는 근무 환경을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특히 법관인사 이원화 제도에 따라 고법 판사들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고등법원에서만 근무하는데, 지법 판사보다 법원에 붙어있을 유인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지법의 경우 영장 재판부나 각종 신청사건 전담부 등 ‘숨 돌릴 만한’ 다양한 재판부가 존재하지만, 고법은 민사와 형사, 행정 사건만 도맡는 데다 2심이라는 심리적 부담도 크다. 예전엔 고법 판사로 있다 지방법원장으로 가 사법행정을 경험하는 것도 하나의 활력소 역할을 했지만, 법관인사 이원화 제도와 법원장 후보 추천제로 길이 막혔다.  

지방 근무 가능성이 커진 것도 변수가 됐다. 법관인사 이원화 제도는 고법 판사가 특정 고등법원에서 계속 근무하는 것을 어느 정도 전제하며 시작했지만, 지방 고등법원에 고법 판사가 부족해지면서 수도권 고법 판사들이 지방으로 내려가는 일이 빈번해진 것이다. 

판사들은 법관을 증원해 과중한 업무 부담을 경감하는 한편, 고법 판사들에게는 안식년 제도 등 동기부여 기회를 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이후 사라지거나 줄어든 각종 파견직도 부활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높다. 국회나 외교부, 감사원, 기획재정부 등 연관 부처 업무 경험을 쌓아야 장기적으로 재판의 질도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지법 부장판사는 “파견 업무가 청탁이 오고 가는 자리라는 오명을 쓰고 있지만, 비법조인인 공무원들이 하는 입법 업무 등에 판사들이 조언하는 것은 결국 실제 재판에서 법 조항을 원활하게 적용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다시 떠오르는 ‘행정처 역할론’

 
이런 법원 내부 목소리가 법원행정처를 통해 실제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다. 판사들은 김명수 대법원장이 추진한 ‘사법행정 비법관화 방침’을 원인으로 꼽는다. 법원행정처에서 판사들이 맡던 주요 업무를 일반 공무원들이 넘겨받으면서 ‘판심(判心) 수렴’이 사실상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그나마 남아있던 법원행정처 요직은 대법원장의 측근을 앉히는 자리가 됐다는 비판 역시 임기 내 따라다녔다.

인사 발령 실수, 사건 배당 실수 등 ‘작은 행정처’로 인한 부작용이 계속되다 보니, 임기 말 김 대법원장은 과거 사법 행정을 경험한 법관들을 다시 행정처로 불러들여야 했다. 한 지법 부장판사는 “결국 ‘적폐 판사’로 몰았던 사람들을 도로 끌어다 일을 시킬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이라며 “판사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법행정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볼 때”라고 말했다.

 
법원 내부에서 자신 있게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분위기가 굳어졌다는 지적도 있다. 한 지법 부장판사는 “고등 부장들이 법원을 재건하는 데 전면에 나섰으면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있다”며 “김명수 대법원장 임기 5년간 능력 있고 사명감 있는 고등 부장들을 완전히 뒷방 늙은이로 만들어 버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다른 지법 부장판사는 “김 대법원장이 정착시킨 제도들을 다 뒤엎을 수는 없다”면서도 “법관인사 이원화 등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제도들은 차기 대법원장이 판사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해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