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를 되살려보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가운데 일본 내 변화의 기운이 일부 감지되는 부분이 있다. ‘약탈 문화재 반환’과 관련해서다. 침략의 역사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던 일본이 학교에서 약탈 문화재 반환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으로 넘어간 한국 문화재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일본의 일부 고등학교가 지난해부터 문화재 반환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으로 5일 확인됐다. 지난해 초엔 일본 규슈대 입시에 약탈 문화재 반환 관련 문제가 출제되는 등 문화재 반환에 대한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일 교재에 오른 질문 ‘문화재가 있어야 할 곳?’
일본 고등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역사종합 교재에 처음으로 약탈 문화재 반환 문제가 실렸다. 2010년 체결된 한일도서협정도 소개돼있다. 도쿄=김현예 특파원
일본 교과서와 교재를 만드는 도쿄호레이(東京法令)출판사는 올해 일본 고등학생들이 배우는 역사종합 교재인 『질문으로 시작하는 역사종합』에 약탈 문화재 반환 문제를 실었다.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이다. 일본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 교재에 약탈 문화재 반환을 실은 것은 이 출판사가 처음이다. 도쿄호레이가 내놓은 교재는 고교생들이 배우는 역사종합 교과서를 보충하는 교재로, 가나가와(神奈川) 현의 한 고교가 지난해 이 교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도쿄호레이는 도쿄와 나가노에 본사를 두고 있는 곳으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인 1948년 설립된 중소 출판사다.
교재는 ‘문화재가 있어야 할 곳은?’이란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영국 대영박물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등 세계 주요 박물관에 문화재를 돌려달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는 것을 소개하며 식민지 지배와 문화재 이슈를 거론한다. 눈에 띄는 것은 문화재 불법 거래를 금지한 유네스코 조약(1970년)에 대한 소개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 따르면 1970년 협약으로 불리는 이 조약은 전쟁과 식민지 지배, 도난 등을 통한 문화재를 반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한국도 이 조약에 1983년 가입했다. 교재엔 2021년 프랑스가 과거 식민지였던 서아프리카 문화재를 반환한 사실과 함께 2010년 한·일간 체결된 한일도서협정도 소개했다. 약탈 문화재 반환이 세계적인 추세라는 점을 알린 셈이다.
일본 역사종합 교재에 처음으로 실린 약탈 문화제 반환 문제가 실렸다. 불법 문화재 반출과 거래를 금지한 유네스코 조약과 함께 오른쪽 하단에 2010년 체결된 한일도서협정을 소개하고 있다. 도쿄=김현예 특파원
한일도서협정은 2010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가 체결한 것으로 이 협정으로 일본 왕실에 있던 조선 왕실의궤 등 약 1200권이 이듬해 한국에 반환됐다. 조선총독부가 1922년 강탈해 일본으로 넘어간 지 약 90년 만의 일이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해외에 있는 한국 문화재는 올 1월 기준 총 22만9655점. 이중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등에 있는 것은 9만5622점으로 전체 해외 유출 문화재의 41%에 달한다.
문화재 반환에 대한 인식 변화를 엿볼 수 있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해엔 규슈대 입시에도 문화재 반환을 주제로 문제가 출제됐다. ‘런던에 소재한 대영박물관과 미국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 세계 주요 박물관 상당수엔 식민지에 있던 유적, 식민지 원주민들로부터 다양한 형태로 가져간 것들이 수장돼 있다’는 설명과 함께 ‘문화재 반환’ 해결 방법을 서술하라는 소논문이 나왔다.
일본 도쿄 우에노에 있는 국립박물관. 오른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동양관으로 이곳엔 한국 문화재 1100여점이 전시돼있다. 도쿄=김현예 특파원
이 규슈대 입시문제에 실린 책 『문화재 반환 문제를 생각하다, 부(負)의 유산을 청산하기 위해서』를 쓴 이가라시 아키라(五十嵐彰)는 “약탈 문화재 반환이 세계적인 흐름인 상황 속에서 일본 역시 이런 흐름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평가했다. 고고학자로 시민단체 활동을 통해 문화재 반환 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는 그는 “결국 입시에 출제된다는 것은 학생으로선 앞으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로,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라고 본다”고 말했다.
도쿄 국립박물관에 전시 중인 '오구라 컬렉션'인 신라시대 금제 귀걸이 장식. 사진 도쿄 국립박물관 홈페이지 캡처
그는 도쿄(東京) 우에노(上野)에 있는 국립박물관 동양관에 있는 오구라(小倉) 컬렉션 얘기를 꺼냈다. 동양관에 전시된 문화재 중 절반 이상이 오구라 컬렉션일 정도로 오구라 컬렉션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는 일제강점기 시절 대구에서 사업으로 큰돈을 번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가 수집한 것으로, 사망과 함께 유족들이 1980년대 초 일본 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 가야의 금관은 물론 신라 금동관모, 고종의 익선관, 순정효황후 당의 등 1100여 점에 달한다. 이중 일부는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등록돼있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 측에 오구라 컬렉션 반환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개인 소유물이라며 이를 거부했었다.
“전리품의 도쿄 국립박물관 보관 자체가 문제”
일본에서 약탈 문화재 반환 운동을 하고 있는 고고학자 출신 이가라시 아키라는 처음으로 교재에 문화재 반환이 실린 데 대해 ″반환해야 하는 문화재가 세계는 물론 일본에도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도쿄=김현예 특파원
이가라시는 “국립박물관에 있는 오구라 컬렉션으로 불리는 한국 문화재가 왜 이곳에 있는지를 적어야 하며, 또 불법으로 빼앗았기 때문에 적지 못한다면 돌려줘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오구라의 메모를 언급했다. 오구라는 1964년 자신이 수집한 문화재의 목록과 함께 기록을 남겼는데, 여기엔 주칠 12각상도 포함돼 있다. 오구라는 ‘건청궁에서 일본인 자객이 민비(명성 황후)를 암살한 뒤 가지고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가라시는 “당시 전리품으로 가져온 이런 것들이 도쿄 국립박물관에 있다는 자체가 문제로 반드시 반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한·일청구권 협정 당시엔 개인 소유물이라 반환하기 어려웠다면, 이제는 국가인 국립박물관 소유이기 때문에 반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김현예 특파원 hyk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