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7일 보험·공제 가입을 조건으로 의료사고에 대한 공소를 제한하는 ‘의료사고처리특례법안’을 발표하자 시민·환자단체는 “의사에게는 특혜를 주면서 환자의 사고입증 부담은 가중시키고, 형사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법안”이라며 반발했다.
법안에 따르면 의료인이 ‘책임보험·공제’(보상한도가 정해진 보험)에 가입하면 미용·성형을 포함한 모든 의료행위 과정에서 과실로 환자에게 상해가 발생했더라도 환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
피해를 전액 보상하는 ‘종합보험’에 가입했다면 피해자가 원하더라도 소 제기를 할 수 없다. 응급·분만 등 필수의료 행위의 경우 중상해에도 공소를 제기할 수 없게 된다.
이에 환자·소비자 단체는 “의사에게 형사 특례를 주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환자에게 충분한 피해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료사고 피해를 의심하는 환자들은 전문성·정보 부족으로 사고를 입증할 길이 없어 증거 확보 등을 위해 형사와 민사 소송을 함께 제기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의사 쪽으로 의료사고 입증 책임 전환이 되지 않으면 보험사에서 보험금 지급이 되지 않기 때문에 보상·배상액이 얼마나 늘어나든 소용이 없다”며 “이렇게 피해 구제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특례법은 의사 특혜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달 초 특례법 추진 발표 직후 ‘의료분쟁 제도 개선 협의체 탈퇴’를 선언했던 환자단체연합회의 안기종 대표는 “처음 발표했을 때보다 더 환자에 불리하게 됐다”며 “중요한 건 보험에 가입시키는 게 아니라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사고 입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환자의 입증 책임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의료분쟁 조정 절차’를 거치도록 한 것에 대해서는 “환자들은 의료분쟁조정에 대해 신뢰가 없다. 변호사들에게서 ‘분쟁조정이 더 불리하다’는 말도 듣는 상황”이라며 “의료분쟁조정법 개정도 하지 않고 그저 ‘노력하겠다’고만 하는데 개혁 수준으로 감정 절차 등을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소용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회정책국장도 “환자·소비자 입장에서 의료분쟁조정은 사고를 해석하고 감정하거나 인과 관계를 밝힐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라며 “의료기관은 분쟁조정을 하다가도 얼마든지 소송으로 전환할 수 있는데, 입증 책임이 의사에게로 전환되지 않으면 손해배상 청구는 여전히 어려울 것”이라고 비판했다.
환자·소비자단체는 특례법 도입이 논의될 때부터 “의료사고처리특례법이 벤치마킹한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은 2009년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은 운전자의 보험 가입을 조건으로 형사 면책 조항을 두고 있었으나, 당시 일부 위헌 판결을 계기로 면책 조건이 강화됐다.
당초 발표와 달리 종합보험 가입 시 환자 의사와 무관하게 특례를 부여하도록 한 것, 필수의료 분야의 ‘불가항력’ 사고가 아닌 모든 사고에 소 제기를 면하게 해준 것도 쟁점이 될 전망이다.
안 대표는 “박민수 차관이 처음 발표한 정책 패키지에서 환자 동의가 없는 경우 특례를 제한한다고 분명히 밝힌 방향과 배치되는 내용이며, 불가항력이 아닌 사고에 의해 입은 중상해까지 공소 제기를 못하게 막은 것은 환자에게 매우 불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환자·소비자 단체는 오는 29일 개최될 특례법 공청회에서 이같은 조항을 들어 추진을 막는다는 입장이다. 안 대표는 “법률에 위헌적 소지가 있으며 사회적인 합의를 거치지 않았고, 환자에게 크게 불리한 내용이라는 것을 강조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