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취운정에 경성 첫 도서관…유길준 ‘서유견문’ 낳았다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3·1운동 이후 도서관 설립 확산 

집옥재와 팔우정. 왼쪽에는 서고인 팔우정, 오른쪽에는 이층 복도로 연결된 경복궁 집옥재가 있다. 집옥재는 현재도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작은도서관으로 운영 중이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집옥재와 팔우정. 왼쪽에는 서고인 팔우정, 오른쪽에는 이층 복도로 연결된 경복궁 집옥재가 있다. 집옥재는 현재도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작은도서관으로 운영 중이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지식은 인류의 오랜 삶 속 경륜으로 쌓이고 또 쌓인다. 급기야 인쇄술의 발전을 거쳐 책으로도 긴 축적의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그 지식은 권력을 쥐거나 그에 가까웠던 계층의 전유물과 다름없었다. 근대는 그런 두텁게 쌓인 인류 지식의 접변(接邊)이 일반인에게 널리 퍼지는 과정과 함께 닥친다. 그 매개는 바로 ‘도서관’이다.

식민지 초기 경성에는 도서관다운 도서관은 없었다. 문맹률이 높아 이용할 사람도 적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3·1운동 이후 학교 진학률이 높아져 문맹이 줄어들고 도서관의 필요성도 높아졌지만, 공공도서관 성격의 대중 도서관은 없었고 소위 ‘종람소(縱覽所)’라고 하여 신문이나 잡지 열람소만 있었다. 아울러 여러 종류의 독서회나 야학이 성행했다. 그중 대표적으로 알려진 것이 개화파 윤치호가 1904년 8월 남문 밖 약현동에 세운 신문종람소다. 그는 이때 교육사업과 병행해 소규모 도서관 사업을 추진했고, 1906년에는 대한도서관 설립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조선인에 의해, 경성에 세워진 제대로 된 사립도서관이 처음 들어서는 때는 1920년 11월 5일이다. 위치는 종로구 가회동의 조선귀족회 소유 취운정(翠雲亭)이다. 윤익선·윤양구·김장환이 주도했고, 관장은 김윤식이 맡았다. 매일신보에 따르면, 1920년 11월 27일 개관식에 내빈 300명과 학생 수천이 참석했다.

고종, 서구 문물 소개책들 집옥재 보관

이 도서관은 민지(民智)의 계발에서 더 나아가 민족운동의 기지로 쓰이기도 했다. 취운정은 박규수를 비롯한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서재필·유길준 등 개화파가 탄생한 산실이기도 했다. 또 이 장소는 갑신정변이 구상된 곳이며, 해외에서 귀국한 유길준이 『서유견문』을 저술한 곳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서관은 1년도 지나지 않아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이범승이 종로 탑골공원 서편에 세운 새로운 경성도서관의 분관으로 존속하다 폐관하고 말았다.


종로도서관보 창간호. [사진 국립한글박물관]

종로도서관보 창간호. [사진 국립한글박물관]

이범승은 친일파이긴 하나 일제강점기 공공도서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1921년 9월 일본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총독부로부터 종로2가 탑골공원 서문 일대 부지 531평과 이왕직 양악대(洋樂隊) 건물을 빌려 새로운 경성도서관을 설립했고, 이후 민영휘의 도움을 받아 130여 평 규모의 석조 2층 양옥 신관을 개관했다. 현재는 인왕산 아래 서울시교육청 종로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1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고종은 아관파천을 거치면서 덕수궁 주변 정동에 집착했다. 20세기 후반 외교 공관과 선교사들이 대거 입주하며 일종의 서양인촌을 형성한 이 지역에서 좀 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종은 정동 덕수궁으로 이전하기 전 서구 선진 문물을 소개한 서책들을 왕조 도서관 역할의 규장각으로부터 수집해 집옥재(集玉齋)에 보관했다. 집옥재는 지금도 경복궁 향원정 북쪽에 있다.

이후 고종이 정동 덕수궁에 기거하면서 그 후면에 지은 도서관이 바로 ‘황제의 도서관’으로 불리는 중명전(重明殿)이다. 중명전의 원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으로 1899년 한성부 건축기사로 초빙된 미국인 다이(J. H. Dye)의 설계로 1층 서양식 건물로 지어졌다. 1901년 11월 화재로 전소되자 이듬해 회랑이 있는 2층 건물로 재건축되었다. 고종은 이처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정동 주변, 열강의 공사관 한복판에 집무실 겸 ‘황제의 도서관’을 세워 위엄을 높이려고 했지만, 이 도서관은 나중 대한제국의 국권을 넘겨준 을사늑약 체결의 장소로 쓰였다.

경성도서관(현 종로도서관)이 종로구 탑골공원 서편에 위치했을 당시 도서관 내부 전경(1967년 7월 21일자 사진).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경성도서관(현 종로도서관)이 종로구 탑골공원 서편에 위치했을 당시 도서관 내부 전경(1967년 7월 21일자 사진).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한편 정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금의 종로 4거리(현 영풍문고 언저리)에 ‘한성감옥서’가 있었고, 여기에는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수감된 구한말 개혁파들이 있었다. 이와 관련해 최근 밝혀진 사실은 1902년경 이 한성감옥서에 수감된 개혁파 주도로 옥중도서관이 만들어졌고, 그들이 옥중에서 함께 책을 읽으며 근대적 민주국가 건설을 꿈꿨다는 것이다.

2022년 3월, 월남 이상재 선생 유족들에 의해 당시 이 한성감옥서에서 작성된 143쪽에 달하는 ‘옥중도서대출부’가 공개되어 그 목록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 책들이 결국 그들이 바라본 세상을 설명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한성감옥서 옥중도서관 설립을 주도한 사람이 놀랍게도 훗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우남 이승만이었다. 한성감옥서는 이후에도 경성감옥, 서대문형무소, 안양교도소로 그 역사를 이어갔다. 백범 김구도 서대문형무소 내에서 이승만이 설치했던 서적실 장서를 읽었다는 회고를 남긴 바 있으니, 이 땅의 지도자와 함께 근대사 속에서도 도서관이 살아 숨 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경성에서 도서관 운영이 그나마 활발해진 것은 3·1운동으로 사회 분위기가 바뀌며 일제가 그동안의 무단정치에서 벗어나 일종의 사상교화를 위한 국가주의 시스템으로 도서관의 중요성을 인지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 결과 일제는 국가 중앙도서관으로서 모든 도서관을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설립한다. 일제는 조선인에 대한 사상 선도를 목적으로 한 조선신교육령(朝鮮新敎育令)을 발령하고 이에 맞춰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중구 소공동 6번지에 세우게 된 것이다. 1923년 12월에 본관을 준공했는데, 전체 대지 면적 1980여 평에 지상 2층, 반 지하 1층 규모였다. 이 본관 건물은 1974년 7월 ㈜롯데 측에 인도될 때까지 조선총독부도서관·국립도서관·국립중앙도서관의 이름으로 쓰였다. 이 건물은 지금 사라졌지만 소설가 고 박완서의 작품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그 역사성이 다시 화제에 올랐다. 박완서는 해방 전인 국민학교 5학년 때 친구 복순이와 같이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찾아간다. 그곳에 대한 첫인상이다.

조선총독부도서관, 해방 후 국립도서관

‘선생님이 가르쳐준 도서관은 지금의 롯데 백화점 자리였다. 그때 그 도서관을 우리는 공립도서관이라고도 했고 총독부 도서관이라고도 했다. 해방되고 나서 국립도서관이 된 바로 그 건물이었다. (중략) 안에 충충하게 고여 있는 어둡고도 서늘한 정적을 훔쳐보는 것조차 두려워서 가슴을 졸이며 열려 있는 문을 이문 저문 조심스럽게 엿보고 다니는데 정복을 입은 수위가 달려왔다. 나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내 동무는 또박또박 교과서에서 배운 도서관 이용법을 직접 해보려고 왔노라고 말했다.(중략)’

이후 수위의 안내를 받은 박완서와 그의 친구는 어린이열람실이 있는 ‘경성부립도서관’으로 향한다. 당시 경성부립도서관은 조선호텔에서 대로변 하나를 대각선으로 건너면 될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이렇듯 1920년대에 동명의 여러 ‘경성도서관’을 비롯하여 조선총독부도서관과 주요 공립도서관이 대부분 세워졌다. 그 중 경성 지역 도서관은 일제강점기 대표적 도서관으로 가회동·종로·소공동·정동·용산에 자리 잡았다. 총독부도서관과 경성의 도서관은 직원이나 장서, 예산이 가장 많아 위상과 역할에서도 한반도 전체 도서관에 영향을 미쳤다.

재미있는 것은 지리·공간적으로 지금의 정동과 서울시청을 중앙에 놓고 가회동이나 종로로 이어지며 주로 조선인이 거주한 북촌, 청계천 건너 일본인이 많이 거주한 소공동과 명동 일대에서 용산으로 확장해 가는 지역에 공공도서관이 세워져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인 배재학당 도서실, 고종의 황실도서관 중명전이 경성 한복판에 자리 잡았음을 보면, 이 지역의 도서관 집중 현상은 당대의 통치 전략과 무관하지 않았다.

결국 일제의 통치에 맞서 구국과 민중 계몽운동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던 도서관은 그 한계가 분명했지만 그래도 이 땅의 민중이 사회의식을 갖고 ‘비판하는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을 조금씩이나마 확보해 간 공간이 아니었을까.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송승섭 명지대학교 문헌정보학과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