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보내진 북 전쟁고아 5000명, 강제소환 아픔 담았죠”

 ‘건국전쟁’ 김덕영 감독, 이번엔 ‘김일성의 아이들’ 재개봉

21일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만난 ‘김일성의 아이들’ 다큐 감독 김덕영. 최기웅 기자

21일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만난 ‘김일성의 아이들’ 다큐 감독 김덕영. 최기웅 기자

김덕영 감독에게 다큐멘터리 ‘김일성의 아이들’은 영화 제작을 결심한 지 16년 만에 완성한 회심의 작품이자, 쥐꼬리만한 제작비를 아끼느라 1년간 동유럽 각국을 노숙인처럼 떠돌며 자료를 모으고 증언을 채록해 만든 ‘영끌’ 영화다.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아 감독의 말처럼 “먼지 켜켜이 뒤집어쓰고 녹슬어가는 필름통에 갇혀 영원히 묻힐 뻔한 역사를 발로 뛰어 발굴해 낸 자부심 가득한 성과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2020년 극장 개봉한 영화의 관객수는 1768명 (영화진흥위원회 발권통계)에 그쳤다. 2024년의 관객은 그 ‘처참한 실패작’을 다시 스크린으로 불러냈다.

오는 25일부터 감독판으로 극장 재개봉을 하게 된 건 올 초 다큐멘터리로는 초유의 117만 관객을 동원한 ‘건국전쟁’의 후광 때문이지만, 김 감독은 자신있게 말했다. “어느 원로 언론인이 김덕영 최고의 작품은 ‘건국전쟁’이 아니라 ‘김일성의 아이들’이라고 말하더군요. ”

아닌게 아니라, 이 영화는 제목만 보고 흔한 반공영화 부류일 것이라 생각한 선입견을 첫장면부터 깬다. 직접화법으로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대신, 역사적 사실을 한발 물러선 시선으로 담담하게 보여줌으로써 휴머니즘과 인간애, 그리고 이를 억압하는 이념과 체제의 벽을 관객으로 하여금 묵묵히 생각하게 만든다.

6·25전쟁으로 10만 명의 전쟁 고아가 한반도에서 생겼다. 감독의 나레이션처럼 대한민국은 이들을 개인 가정에 입양 보낸 반면, 북한은 소련의 프로젝트에 따라 5000여 명을 선발해 동유럽 5개국의 기숙학교에서 위탁교육을 받게 했다. 사회주의 국제연대의 발로였다. 감독은 동유럽 시골 마을 곳곳에 산재해 있는 그들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다. 김 감독이 찾아낸 사연 중에는 북한 아이들을 인솔해 온 교사 조정호와 만나 결혼했다가 북한 당국의 강제 이혼 조치로 1961년 생이별한 뒤 90세가 된 지금까지 재회를 기다리고 있는 루마니아 여교사 제오르제타 미르초유의 믿기지 않는 순애보도 있다.

동유럽 5개국 기숙학교 등서 위탁교육


폴란드 학교에서 현지 학생들과 공부 중인 북한 전쟁 고아들. [사진 다큐스토리]

폴란드 학교에서 현지 학생들과 공부 중인 북한 전쟁 고아들. [사진 다큐스토리]

북한 고아에 관한 사실 자체를 아는 사람이 드문데 어떤 계기로 영화를 만들게 됐나.
“박찬욱 감독이 2004년 동유럽에 갔을 때 현지의 한 선교사로부터 미르초유 할머니의 스토리를 영화로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왔다. 어느날 친하게 지내던 박 감독의 매제로부터 연락이 왔다. 짐작컨대 소재 자체가 박 감독의 극영화보다 다큐멘터리에 더 어울린다는 판단을 한 게 아닐까. ”
 

다큐멘터리는 철저한 사실 검증을 해야하는데.
“북한 전쟁 고아에 대한 기록이 전무했다. 할머니를 인터뷰한 뒤에도 내가 어디 홀린 게 아닐까, 과연 저 얘기가 사실일까 의구심이 남았다. 수소문 끝에 어느날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기록보관소에 당시 필름이 남아 있다는 연락을 받고 할머니를 모시고 갔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필름을 돌리니 화면에 북한 아이들이 나오는데, 할머니가 ‘얘는 영숙이, 쟤는 철수’ 하면서 정확히 한국 이름을 부르며 눈물 흘리는게 아닌가. 그 때 모든 의구심이 사라졌다. 그 때부터 북한 고아와 만났던 사람들을 동유럽 각지로 찾아 나섰다.”
 
아이들 귀국길, 재일교포 북송과 오버랩

루마니아 북한 학교 교사로 만나 결혼한 루마니아인 미르초유(오른쪽)와 북한인 조정호와 그들의 딸. [사진 다큐스토리]

루마니아 북한 학교 교사로 만나 결혼한 루마니아인 미르초유(오른쪽)와 북한인 조정호와 그들의 딸. [사진 다큐스토리]

전쟁통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낯설고 말 통하지 않은 유럽땅에서 유소년기를 보내며 성장했다. 그 배경엔 가족과 다름없이 그들을 대해준 유럽인 교사와 위탁가정 부부들의 배려와 사랑이 있었다. 김감독은 “가령, 불가리아는 북한 아이들에게 가정 위탁을 시켰다. 가정마다 입이 하나씩 더 생겼지만 추가 배급은 없었다고 한다. 가족들이 자기들 먹을 것을 아껴 북한 고아를 키운 것이다. 아이들끼리는 형제나 마찬가지였다”고 설명했다.

5~7년간 평온하게 살던 북한 아이들은 1950년대 후반 소환 명령을 받고 귀국길에 오른다.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재일교포 북송사업의 장면과 묘하게 닮은꼴로 오버랩된다. 북한은 ‘외국물’ 먹은 아이들이 다른 주민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해 뿔뿔이 흩어 시골로 보냈다. 동유럽의 친구들과의 편지 왕래도 1962년부터 일절 금지된다. ‘둔촌’이란 이름의 12세 아이가 자신의 ‘집’이 있는 폴란드로 돌아가려고 중국 국경을 넘어 몽골까지 갔다가 탈진해서 숨졌다는 사연도 편지로 전해졌다.

왜 북한은 같은 공산권 국가와의 교류도 막고 부부간의 인륜까지 끊었을까.
“북한은 1956년 8월 이른바 ‘종파 사건’을 겪으면서 외국과의 교류를 허락하면 김일성 정권의 위기로 이어질 것이란 인식으로 극단적인 순혈주의에 빠졌다. 외국인과 결혼하면 피만 섞이는 것이 아니라 사상과 문화가 모두 섞이니 강제로 배척했다. 그런 태도가 3대 세습을 통해 김정은에게까지 이어지면서 종교 수준이 되었다.”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자유의 소중함이다.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인간의 자연스런 교류를 막고 심지어 인륜까지 끊는 상황을 보면 누구나 가슴이 답답해 질 것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북한인과 유럽 교사, 친구들 사이의 훈훈한 인간애가 생겨나고, 그것이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경험과 추억이 된다. 자유와 인간애가 이 영화의 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