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과 여소야대 구조의 국회가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면 정치적 갈등이 한층 커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그래픽=김지윤 기자
여당과 야당이 자리를 바꿔가며 복수하는 탓에 정치적 내전은 웬만해서 끝나지 않는다. 이렇게 대통령과 국회의 상호 존중 규범이 사라진 대통령제는 이중정부를 제도화하며 몰락한다. 라틴아메리카의 대통령제 정부들이 지난 30년간 저랬다.
한국의 대통령제 역시 돌이킬 수 없는 ‘붕괴’가 시작된 것 같다. 20대 대선 이후 여소야대 상황을 보자. ‘탄핵’이 키워드인 중앙일보 기사는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 2년 2개월간 약 1600건에 달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전에는 많아야 1년에 50건 정도였다. 그리고 윤 대통령도 거부권을 마치 당연한 듯 남발한다. 탄핵과 거부권은 국회와 대통령이 상대를 견제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하지만 상호 존중이라는 ‘족쇄’에서 풀려나면 두 권한은 총칼을 대신하는 내전 수단이 되고 만다.
2017년 탄핵의 부작용 이어져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른 것일까? 나는 제3지대 실패 원인과 한국 정치가 퇴보하는 이유가 같은 맥락에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현 상황은 2017년 탄핵 사태의 장기 부작용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2017년 이후 다원주의를 거부하는 정당으로 타락했다. 시민단체 출신 야심가, 86세대 운동권 정치인, 한총련 출신 정치지망생, 온라인 인플루언서 등이 ‘촛불 연합’이란 이름으로 민주당에서 뭉쳤다. 이들의 세계관은 다원주의로 대표되는 전통적 민주당 계보와 다르다. ‘적폐청산’이란 구호처럼 정적은 절멸시킬 대상이다. 촛불 집회 구호인 ‘주권자의 명령’처럼 다수가 절대권력을 가진다고 믿는다. 정당 운영도 같다. 양당제에 적합한 포괄정당을 거부하고 ‘개딸’ 같은 팬덤 당원의 명령에 따라 ‘수박’이라 불리는 내부 비판자를 쫓아냈다.
국민의힘 계열 보수 정당은 2017년 이후 무능과 무기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양당제에서 집권 가능한 정당은 내부에서 다양한 정치적 지향과 계보가 경쟁을 벌이며 중도층까지 포섭하는 포괄정당이어야 한다. 그런데 국민의힘을 보면 내부에 지향과 계보라는 게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이번 총선만 봐도 보수 정당과 별 관계가 없는 검사 출신 선·후배가 대통령과 당 대표로 전면에 나섰다.
시대 조건에 따라 진보나 보수를 선택하는 ‘중도층’의 성격도 바뀌었다. 진보와 보수는 더는 경쟁력 있는 가치가 아니다. 유권자의 가슴에 남는 것은 과거의 정념인 원망과 복수다. 20대 대선에서 중도 성향 유권자 상당수가 ‘정권에서 버림받은’ 전직 검찰총장에게 한 표를 주는 것으로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한 원망을 표현했다. 22대 총선에서는 윤 대통령에 대한 원망을 그에게 수사받고 나락으로 떨어진 전직 법무부 장관을 지지하는 것으로 쏟아냈다. 더군다나 소선거구제하의 양당제는 이런 ‘복수의 악순환’을 부추긴다.
탄핵 이후 정치 지형에서 제3지대는 생존이 더욱 어려워졌다. 직접 경험을 해봤지만 실제로 선거 레이스가 시작되면 유권자는 원망과 분노로 홍해처럼 갈라진다. 어지간한 정당으로는 건널 수 없다.
그렇다고 제3지대의 문제의식까지 포기하자는 말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걸린 일이다. 프랑스는 20세기 말에 이중정부(이원집정제의 야당 총리)를 자주 겪으며 세계화 시대에 개혁을 하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독일에 완전히 뒤처졌다. 20세기 초 독일 바이마르 정부는 대통령과 국회가 극한의 대치를 하다가 결국 히틀러에게 쿠데타 기회를 내주며 몰락했다. 역사의 갈림길에서 이중정부는 후대에 큰 피해를 남긴다.
대통령 중임제는 해결책 아니다
참고로 민주당에서 거론되는 중임제는 대안으로 부적합하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대통령에게 재선 유인을 준다고 무너진 상호 존중의 규범이 되살아나지도 않는다. 민주당이 대통령과 국회를 모두 차지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현직 심판이라는 소선거구제의 특성상 권력을 독점한 정당은 다음 총선에서 패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내전이 반복될 뿐이다.
한지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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