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이시바 시게루(石破茂·67) 정권이 1일 공식 출범했다. 신임 이시바 총리는 이날 오후 열린 임시국회에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67)전 총리의 후임으로 선출됐다. 이시바 총리는 오는 9일에 중의원(하원)을 해산하고, 27일 총선거를 치를 예정이다.
이시바 시게루 신임 총리가 1일 일본 총리 관저로 들어서고 있다. AFP=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12년 이래 지난 12년간 자민당 내에서 정적 아베 신조(安倍晋三·1954~2022) 전 총리와 각을 세우며 ‘비주류’의 길을 걸어온 이시바 총리는 자신의 첫 내각을 무파벌(無派閥) 중심으로 꾸렸다. 자신을 포함한 20명 각료 중 12명이 계파와 무관한 인물이다. 마이니치신문은 “기시다 정권의 비주류가 이시바의 주류로 돌아섰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앞선 기시다 정권이 무파벌 인사 3명을 기용하고, 자민당 내 파벌을 안배한 인사를 한 것과는 다르단 의미다.
특히 이시바 내각의 탈(脫) 아베 성향이 두드러진다. 지난해 말 불거진 자민당 정치자금 스캔들로 징계를 받은 30여 명을 포함해 옛 아베파 의원들 중 이번 새 내각에 합류한 인사는 없다. 오히려 2022년 7월 총격으로 사망한 아베 전 총리의 국장(國葬) 문제에 대해 “아베는 재정,금융, 외교를 너덜너덜하게 만들었고, 관료 기구마저 망가뜨렸다”면서 ‘국적(國賊·나라를 망친 역적)’이라 비판했던 무라카미 세이이치로(村上誠一郎)를 이시바는 총무상에 발탁했다. 마이니치는 “옛 아베파에게 이번 인사는 비주류파로의 전락을 의미한다”면서 “당내 불만을 포함해 비주류파에선 이시바 정권이 단명으로 끝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온다”고 전하기도 했다.
총리 비서실장과 정부 대변인 역할을 겸하는 요직 관방장관 자리엔 기시다 내각의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를 유임시켰다. 외상과 방위상을 지낸 그는 기시다파로 분류되는데, 이번 총재선거 과정에서 자신을 지지한 기시다 전 총리에 대한 배려로 보인다.
이시바는 관심이 큰 외교와 국방 분야엔 자신의 측근을 임명했다.
우선 외상엔 자신과 가까운 이와야 다케시(岩屋毅) 전 방위상을 앉혔다. 그는 기시다 전 총리와 와세다대를 함께 졸업한 오랜 친구로도 알려져 있다. 이와야는 한·일관계를 경색시켰던 2018년 12월 초계기 갈등 때 방위상이었다. 이듬해 6월 한·일 국방장관 회담에서 웃는 얼굴로 악수해 일본에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던 그는 당내 온건파로 분류된다. 방위상에 발탁된 나카타니 겐(中谷元) 역시 이시바의 측근으로 꼽힌다. 총리 본인을 포함해 하야시 관방장관 등 역대 방위상 출신 총 4명이 '국방 덕후 이시바' 내각에 포진된 것이 이채롭다. 이와관련해 일본 언론에선 "빈약한 당내 인맥을 드러낸 인사"란 부정적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미·일지위협정 개정 의지
이시바 총리는 이날 첫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오랜 시간 주장해 온 미·일 지위협정 개정 의지를 드러냈다. “협정 개정이 일미 동맹 강화로 연결된다”면서다. 협정 개정으로 미국 영토에 자위대 기지를 만드는 것에 대해 “군사적 합리성이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미·일지위협정 개정에 대해 미국이 우려를 갖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선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지역협정을 개정해 나가는 것이 일·미 동맹을 강화하는 것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금융정책에 대해선 “금융완화의 기본적인 기조가 유지되는 것을 기대하면서 지켜보겠다”고 밝혔다. 전날 이시바 정권 출범에 따른 긴축 우려로 닛케이지수가 급락한 것을 의식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그는 ‘저축에서 투자로’의 전환을 강조했던 기시다 정권의 경제정책을 이어나가겠다는 뜻도 피력했다. 납치문제 해결도 언급했다. 기시다 정권이 추진해오던 북·일정상회담 등을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납치 문제는 우리 내각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며 “모든 납북자분들이 하루라도 빠른 귀국을 실현하기 위해 강한 결의를 갖고 임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1일 열린 임시국회에서 한 야당 여성 의원이 '비자금 감추는 해산을 멈추라'는 내용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항의하고 있다. 이날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임시 국회에서 일본 102대 총리로 선출됐다. AFP=연합뉴스
이시바에게 당장의 숙제는 코앞에 닥친 총선이다. 총재 선거 당시만 해도 조기 총선 실시에 소극적이었던 이시바는 총리 취임 하루 전 “10월 27일 총선거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새 내각 출범으로 국민 기대가 큰 상황에서 선거를 치르는 것이 자민당에 유리할 것으로 보고 서둘러 유권자 판단을 받으려는 전략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일본 언론들에선 다른 분석도 나온다. 이시바의 ‘조기 총선’결정엔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자민당 부총재, 모리야마 히로시(森山裕) 자민당 간사장 등 실력자들의 압박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아시히신문은 “(조기 해산과 총선 실시의 기회는)‘지금 밖엔 없다’는 여당의 기대를 앞에 놓고 심사숙고할 여유가 이시바에겐 없었다”고 해석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정권 운영 주도권이 총리 관저에서 당으로 옮겨지는 ‘당고정저(党高政低)’ 전조가 엿보인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당 내 비주류 출신인 이시바의 총리관저와 내각이 기존의 자민당 실력자들에게 끌려 다닐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어쨌거나 총선거를 어떻게 치러내느냐에 이시바 정권의 순항이 달려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한편 외교부는 대변인 논평에서 “이시바 총재의 총리 선출과 신(新) 내각 출범을 축하한다”며 “안보, 경제, 글로벌 어젠다 등 모든 분야에서 한 단계 발전된 미래지향적 협력 관계를 만들기 위해 일본 정부와 함께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도쿄=김현예 특파원 hyk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