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미국 보스턴의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인 피아니스트 손민수. 이달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피아니스트 손민수의 ‘첫 골드베르크’는 대학 졸업 연주였다. 스승인 변화경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 교수가 권한 작품이었다. 서양 음악의 거대한 기둥인 J.S.바흐가 남긴 장대한 작품,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그는 20세 남짓할 때 처음 연주했다.
캐나다의 호넨스 국제 콩쿠르 우승자로 음반을 낸 2011년에도 손민수는 주저 없이 이 곡을 골랐고, 음반은 그 해 뉴욕타임스의 명반 톱 25에 들었다. 2007년 캐나다에서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75주년 기념 음악회, 2012년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골드베르크를 연주했다. 한국에 돌아왔던 첫 독주회(2016년), 2022년 명동성당 연주에서도 그는 이 곡을 선택했다.
바흐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건반 악기 작품이다. 32마디짜리 주제를 변형한 30개의 변주곡이 총 80분동안 이어진다. 마지막에는 주제가 똑같이 한번 더 연주된다.
손민수가 거대한 변주곡을 다시 한 번 꺼내들었다. 이달 미국과 캐나다의 연주를 거쳐 13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연주한다. 16일 한남동의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 17일 부산, 31일 보스턴까지 한 달 내내 이 곡을 들려줄 예정이다.
손민수는 “몇번인지 세어본 적은 없지만, 대학 졸업부터 30여년동안 가장 많이 연주한 곡일 것”이라고 했다. 그는 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계속해서 손에 들고 있을까. 마침 그의 제자 임윤찬도 내년부터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를 예고해 놓은 상태다. 수많은 피아니스트가 중요한 순간에 이 작품을 연주하려는 이유는 뭘까. 최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손민수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정신이 우리에게 남긴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대학을 졸업할 당시의 골드베르크 연주는 어땠나.
“당시 나는 엄청난 혈기를 가진 성격이었다. 현란한 음악, 단숨에 사로잡는 작품들이 나를 끌어당겼다. 그런 나에게 선생님이 이 곡을 권했다. 사실 이 곡을 알고 있었지만 어떤 곡인지는 생각도 안 했던 상태였다. 연주는 어려웠고, 발가벗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음악에는 감정만 있는 게 아니고, 감정을 지적으로 소화한 상태에서 음악의 힘이 더 세진다는 걸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요즘 변화경 선생님을 만나면 ‘그때는 그렇게 바흐ㆍ베토벤을 어려워하더니 지금은 그것만 치고 있다’고 농담을 하신다.”
그 후로 많은 무대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했다.
“처음에는 너무 높은 곳에 있다고 느꼈다. 그 후에 한발씩 들어가보니 한없는 깊이가 보인다. 매일 밤 나가서 하늘을 보면 안 보이던 별도 보이지 않나. 바흐가 남겨놓은 세계는 끝이 없는데 사람이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새로운 발견이 된다.”
“모든 것이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의 꿈이자 건반 악기의 백과사전이다. 바흐의 바로크 시대에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이 있다. 과거 뿐 아니라 미래까지 있다. 10번 변주에서는 모차르트가, 19번에서는 슈베르트가 보인다. 15번은 20세기의 12음계까지 예견하는 듯하다.”
방대한 작품을 수없이 반복해서 연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찾아 나가야할 것들이 소멸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흐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감정들을 찾아가다보면 진리와 진실을 발견하는 기분이다. 이 곡이 다시 한 번 숨 쉬고 나를 통해 전달된다는 것이 소중하다. 가장 이상적으로는 나는 프리즘 같은 존재일 뿐이고 바흐라는 빛을 수많은 컬러로 내놓아야 한다고 본다.”
현재 미국 보스턴의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인 피아니스트 손민수. 이달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여러번 했던 곡이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이미 알고 있는 길로 가려고 한다. 그 길을 보지 않으려고 정말 어렵게 노력을 하는 중이다. 똑같은 길을 그대로 간다면 연주를 안 하는 게 낫다. 습관을 잊는 것이 지금 가장 큰 도전이다.”
바흐가 독일 주재 러시아 대사의 요청으로 작곡한 자장가라는 통설이 있다. 연주자 입장에서 동의하는지 궁금하다.
“이 곡을 듣고는 잠이 더 안 올 것 같다고 생각한다.(웃음) 게다가 자장가를 쓴다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긴 곡에 수많은 감정과 기법을 다 집어넣는 바흐는 전혀 상상이 안된다. 의뢰를 받고 장인의 마음으로 자신만의 세상을 만든 게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바흐가 수학적으로 정교하게 작곡한, 지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을까?
“거기에만 그쳤다면 계획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연주해볼수록 그런 구조적인 것은 음악을 위한 뼈대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곡을 다 듣고 나면 구성의 치밀함이 아니라 인간의 수많은 감정이 정화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의 스승 러셀 셔먼이 해준 ‘죽어있는 영혼과 살아있는 천사들을 위해 노래하라’는 말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제자 임윤찬은 중학생 때부터 이 곡을 치고 싶어했고, 스승의 권유로 미뤘다고 했다.
“바흐의 다른 곡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제자리 걸음밖에 안된다. 그래서 바흐의 연습곡인 신포니아를 다 연습했고 프랑스 모음곡, 평균율까지 공부했다. 음악적으로 영감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골드베르크를 연주한다는 것은 뒷동산 한번 올라보고 에베레스트 산을 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2012년 뉴욕에서 골드베르크를 연주할 때는 20세기 작곡가 안톤 베베른의 5분 남짓한 변주곡, 브람스의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 20여분까지 해서 장대한 프로그램으로 연주했다. 보통은 골드베르크 변주곡만 연주하는데 이례적이다.
“이번에는 7분 남짓한 바흐의 작품과 함께 연주한다. 바흐의 작은 전주곡과 푸가 G장조(바흐 작품 번호 902)다.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같은 조성의 작품이라 골랐다.”
골드베르크의 장대한 여정은 처음 연주됐던 주제를 한 번 더 연주하며 마무리된다. 이 반복을 어떻게 해석하나.
“가장 단순한 노래로 시작해 다시 돌아온다. 긴 여행 끝에 돌아오는 것, 또는 삶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 경험을 한번 하고 나면 잊히지 않는다.”
현재 미국 보스턴의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인 피아니스트 손민수. 이달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손민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지나 바흐의 또다른 거대한 작품인 평균율 전곡 연주에 도전할 예정이다. 한 권에 24곡씩 총 48곡이 들어있는 기념비적 작품이다. 임윤찬은 내년 초부터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에 들어간다. 4월 뉴욕 카네기홀을 비롯한 공연장에서 10여년 전 손민수가 했던 것처럼 베베른의 변주곡과 함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할 계획이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