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투자 비효율"…이랬던 TSMC, 트럼프 당선되자 속도전

# “반값에 해줄 테니 우리랑도 찍읍시다.” 지난 여름 해외 전시회에 참석한 한국 팹리스(반도체 설계) 대표에게 대만 TSMC 담당자가 찾아와 제안했다. 이 회사는 삼성전자 파운드리(위탁 생산)와 신제품 반도체 제조 계약을 했는데, TSMC가 접근해온 것이다. 업계에는 “TSMC가 요새 한국 인공지능(AI) 반도체, 특히 삼성 파운드리 거래사에 유독 후하다”, “삼파의 남은 싹마저 밟으려 한다”는 얘기가 돈다.

# 지난 9일 대만 매체들은 “12월 미국 애리조나 TSMC 공장 준공식에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트럼프 당선인이 참석할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를 쏟아냈다. ‘비효율적’이라며 미국 투자를 미적대던 TSMC는 최근 애리조나 공장 수율이 대만보다 좋다고 공개하는 등 태세 전환에 들어갔다. 4년 전 바이든을 지지했던 애리조나주는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를 밀었다.

지난 9월 미국 애리조나에서 유세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AFP=연합뉴스

지난 9월 미국 애리조나에서 유세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AFP=연합뉴스

 
세계 시스템 반도체에 ‘수율보다 전략’ 시대가 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선 승리로 이 흐름은 급물살을 탔다. 한국 반도체, 특히 파운드리와 AI 가속기 등 반도체 시장 74%를 차지하는 시스템(비 메모리) 반도체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트럼프 2기 반도체, ‘수율’에서 ‘전략’으로 

‘수율(생산효율)과 가격’만 좋으면 환영받는 글로벌 반도체 분업 구조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기존의 구조에서 중국·대만 제조업은 전성기를 맞았다. TSMC 지난 10월 매출은 전년 대비 29% 늘며(약 13조6000억원) 또 기록을 깼다. 그러나 이는 서구 제조업의 붕괴를 불렀고, 첨단 반도체는 국가 안보와 직결된 ‘전략 물자’가 됐다. 

미국 정치가 바이든의 ‘리쇼어링(미국 내 제조 회귀), 프렌드쇼어링(동맹국 내 제조)’을 넘어 트럼프의 ‘대 중국 관세 60%’를 언급하는 배경이다. 경희권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관세가 현실이 되면, 수율은 의미가 없어진다”라며 “이제는 수율의 시대에서 전략의 시대로 간다”라고 말했다. TSMC가 부랴부랴 미국 공장 가동을 앞당긴 배경이다. 대만 매체에 따르면, TSMC 내년 2월 이사회는 아예 미국에서 연다.


AI 패권 교체기, 한국 공급망 지위 약화돼

#지난 9월말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 엔비디아 본사 정문 앞에는 출입증을 받으려는 방문객들이 긴 줄을 서있었다. 거대한 우주선 모양 건물로 들어서니 직원들이 곳곳의 화이트보드 앞에서 그래프를 그려가며 열띤 토론을 벌이는 중이었다.

지난 9월 26일(현지시간) 미국 실리콘밸리 엔비디아 본사 건물 내부에 직원 등 관계자들이 모여있다. 실리콘밸리(미국)=이희권 기자

지난 9월 26일(현지시간) 미국 실리콘밸리 엔비디아 본사 건물 내부에 직원 등 관계자들이 모여있다. 실리콘밸리(미국)=이희권 기자

 
반면, 엔비디아에서 101번 고속도로 넘어 차로 5분 거리인 인텔 본사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인텔 관계자는 “인력 감축 중이라 출근하지 않는 직원들이 많다”고 했다. 인텔은 최근 대규모 정리 해고로 인건비의 절반 가량을 줄인 것으로 알려졌다. 인텔은 중앙처리장치(CPU) 루나레이크의 제조를 자사 파운드리가 아닌 TSMC에 맡기는 등, ‘메이드 인 USA’의 꿈보다 자체 정비에 나섰다. 

전 세계에서 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단 3곳-TSMC, 삼성전자, 인텔- 중 인텔이 나가 떨어지고, 삼성은 아직 수율·성능에서 대형 고객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결론은 모두가 TSMC의 눈치를 본다. 최근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신제품 AI 가속기 ‘블랙웰’의 지연은 TSMC 잘못이 아닌 우리 탓”이라고 말했고, 리사 수 AMD CEO는 다른 파운드리를 이용할 생각 있느냐는 질문에 “TSMC에 만족한다”라고 공개 답변했다.

지난 9월 26일(현지시간) 미국 실리콘밸리 인텔 본사 정문에 적막감이 흐르고 있다. 실리콘밸리(미국)=이희권 기자

지난 9월 26일(현지시간) 미국 실리콘밸리 인텔 본사 정문에 적막감이 흐르고 있다. 실리콘밸리(미국)=이희권 기자

 
‘엔비디아-TSMC 독주’ 시대에 한국의 입지는 크게 축소된 상태다. 모바일에서 AI로 주요 기술이 이동하며 한국 제조산업의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진 영향이다. 모바일을 양분한 구글·애플에게, 한국은 디스플레이·카메라·기판·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등에서 ‘대체 불가능한 공급처’였다. 그러나 AI 시대의 공급망인 ‘초거대언어모델(오픈AI, 구글)- 팹리스(엔비디아)- 전용 메모리(SK하이닉스)- 파운드리·패키징(TSMC)-서버(델)’로 이어지는 구도에서 한국의 영토는 줄었다. 특히 삼성전자는 AI 강자 엔비디아와 고대역폭메모리(HBM) 외에 연결고리가 없는데, 최신 HBM 납품이 지연되며 입지가 좁아졌다.

‘1등 선포’하고 전략은 없었던 한국

전 세계 반도체 공급망을 좌우하는 미국의 정권 교체를 계기로 한국 시스템 반도체 전략도 다시 짜야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은 지난 2019년 대통령까지 나서서 ‘시스템 반도체 2030’ 비전을 선포했지만 “2030년 메모리 1위, 파운드리 1위”라는 구호는 현실적이지도, 전략적이지도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안보 전문가는 “미국이 자국 중심 반도체 공급망을 고민하기 시작한 때에, 메모리를 독점하는 한국이 비메모리도 1등 하겠다고 선포한 건 국제 정세에 지나치게 무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권석준 성균관대 화공학부 교수도 “필요한 비전이었으나, 그에 합당한 투자와 성과 관리에서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라고 평했다. 경희권 위원은 “정부도 과거 수출·양산 위주로 메모리를 지원하던 방식을 넘어,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 육성 정책을 정교하게 다시 짜야 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