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폭풍에도…반도체 공장 돌릴 '전력망법' 외면한 그들

7월 2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본회의를 앞두고 여야가 각각 규탄대회를 벌이고 있다. 당시 이 자리에서 여당은 야당의 '방송4법' 강행처리를 규탄했고, 야당은 여당에 '채해병 특검법' 재의표결에 찬성할 것을 촉구했다.뉴스1

7월 2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본회의를 앞두고 여야가 각각 규탄대회를 벌이고 있다. 당시 이 자리에서 여당은 야당의 '방송4법' 강행처리를 규탄했고, 야당은 여당에 '채해병 특검법' 재의표결에 찬성할 것을 촉구했다.뉴스1

‘트럼프 2.0 시대’를 두 달여 앞두고 전문가들은 “국내 제조업·첨단산업 정책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취임하면 자국 우선주의에 따라 관세 장벽을 세우고 제조업 부활 정책 드라이브를 걸 가능성이 큰 만큼, 국내 산업 지원 정책도 속도감 있게 집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회에 계류된 관련 법안의 처리 속도는 더디다. 22대 국회 들어 거야(巨野)의 입법 독주와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재의요구권) 행사가 반복돼 온 ‘비토크라시’(vetocracy·거부민주주의)의 단면이다. 기획재정위·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 상정된 산업 경쟁력 강화 법안 중엔 여야 간 이견이 없거나 경미한데도 정치적 상황 때문에 처리되지 못하는 법안이 수두룩하다.

①멈춰 선 국가전력망

경남기후위기비상행동 등 환경단체 회원들이 9월 26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12동 대강당에서 열린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공청회에서 원전 확대와 석탄 축소, 송전망 건설 지연 등을 두고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남기후위기비상행동 등 환경단체 회원들이 9월 26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12동 대강당에서 열린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공청회에서 원전 확대와 석탄 축소, 송전망 건설 지연 등을 두고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표적인 사례가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법안이다. 현재 동해안과 남ㆍ서해안의 상당수 송전선로 건설은 각종 송사로 지연되고 있다. 2012년 6월 준공이 목표였던 ‘북당진-신탕정 선로’는 150개월이 지연된 오는 12월에야 완성될 전망이고, 2019년 12월과 2021년 6월이 준공 목표였던 ‘동해안-신가평 선로’와 ‘신당진-북당진 선로’ 역시 각각 66개월 지연된 2025년 6월, 2026년 12월로 늦춰졌다.

송전선로가 부족해 출력을 제어하거나 송전을 제한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전기는 남는데, 보낼 길이 없는 것이다. 동해안의 발전량은 16GW(기가와트)지만, 송전 용량은 11.4GW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지난 7월 동해안의 석탄발전 8기가 가동을 전면 중단한 일도 있었다.

인공지능(AI)이나 반도체 산업 등에는 막대한 전력 공급이 필수다. 이를 위한 기반 환경 조성에 애를 먹고 있는 것이다. 서울과 경기의 전력 자급률은 각각 10%, 62%에 불과한 반면 전력 수요는 국내 최고수준이라 동해안과 남·서해안으로부터 부족량을 충당하고 있다. 경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수요만 해도 수도권 전체 전력수요의 약 24%를 차지한다.


22대 국회 개원 직후 김성원 국민의힘 의원이 대표 발의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모두 10명의 여야 의원이 각각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국가 주도로 송전선로를 건설하고 ▶인·허가에 특례를 주는 등 내용도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소관 상임위인 산자중기위 관계자는 “정쟁으로 인한 여야 충돌로 아직 상임위 심사도 제대로 못 한 상태”라고 전했다.

②방치된 R&D 세액공제 일몰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다음 달 말 일몰을 앞둔 국가전략기술 사업화시설 및 R&D(연구개발) 투자세액 공제를 3년 연장하는 법안도 논의가 더디다. 반도체와 2차전지, 백신, 디스플레이, 수소 등 7개 국가전략기술은 한국의 미래를 좌우할 핵심 산업으로 꼽힌다.

반도체 제조 주요 경쟁국인 미국과 대만은 이미 각각 2029년까지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는 법안을 가동 중이다. 경제계에선 국가전략기술 투자세액 공제가 연장되지 않을 경우 반도체 등 경제안보에 직결된 산업이 경쟁국에 뒤처질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국회도 걱정은 하고 있다. 세액공제를 3년 연장하는 정부안을 비롯해 여야 의원들이 앞다퉈 첨단산업 세제 지원 일몰 연장 방안을 담은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 22개를 쏟아냈다. 최소 3년에서 최대 10년까지 세액공제를 연장하는 방안이지만, 소관 상임위인 기재위에 아직 상정도 되지 않았다.

국가전략기술 대상을 확대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도 지지부진하다. 차세대 첨단 산업으로 손꼽히는 AI 및 클라우드의 경우 국가전략기술이 아닌 신성장ㆍ원천기술로 분류돼 상대적으로 낮은 공제율을 적용받고 있다. 이에 국민의힘 이인선, 민주당 김태년 의원은 AI 및 클라우드를 국가전략기술로 추가 지정하는 법안을 각각 발의했지만, 통과 여부는 불확실하다.

대한상공회의소 관계자는 “최근 10년간 한국 AI 산업 등의 민간투자 누적액은 미국 대비 2%, 이스라엘의 절반 수준인 72억 달러에 불과하다”며 “첨단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법안을 조속히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③방송 전쟁에 지연된 AI 법안

최민희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이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오른쪽 국민의힘 의원들은 모니터 앞에 '갑질 위원장 최민희, 상임위 독재 중단하라'라고 적힌 피켓을 붙이고 자리하고 있다. 뉴스1

최민희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이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오른쪽 국민의힘 의원들은 모니터 앞에 '갑질 위원장 최민희, 상임위 독재 중단하라'라고 적힌 피켓을 붙이고 자리하고 있다. 뉴스1

전문가들은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기술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AI 지원 정책을 강화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미국이 AI 분야에서도 자국 우선주의를 강조할 경우, 한국 기업에 새로운 기술장벽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국내 AI 산업 육성을 위한 법제 정리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에선 2019년 이후 수십건의 AI산업 진흥·육성 법안이 발의됐지만, 단 한 차례도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했다. 공영방송 이슈를 다루는 과방위가 여야 정쟁의 핵심 무대이기 때문이다. 국회 관계자는 “정보통신기술(ICT) 관련 법안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방송 이슈와 함께 법안 2소위에서 다뤄진다”며 “과학기술·원자력 관련 법안보다 처리 속도가 현저히 떨어진다”고 말했다.

실제 22대 국회 들어 발의된 관련 AI 육성 법안은 모두 15건으로, ▶국가인공지능위원회 설치 ▶사전고지제·윤리원칙 마련 등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지난 9월 24일 열린 공청회를 제외하면 아직 제대로 된 법안 심사 한 번 이뤄지지 않았다. 국회 과방위 관계자는 “여야 간 물밑 조율을 통해 이견을 줄였다”며 “이르면 이달 중 통과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美는 세계 제조업 빨아들이는데…대기업 지원 법안 가로막는 “부자감세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 6일(현지시간)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 컨벤션 센터에서 승리 연설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 6일(현지시간)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 컨벤션 센터에서 승리 연설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해 강력한 법인세 인하로 외국 기업을 빨아들이겠다고 밝힌 가운데, 정부가 추진 중인 국내 대기업 지원 법안은 “부자 감세론”의 장벽에 가로막히고 있다.

12일 더불어민주당 원내지도부는 상속세 최고 세율 인하, 최대 주주 할증 폐지 등 정부가 추진 중인 세법개정안에 대해 반대하기로 뜻을 모았다. 노종면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회의 직후 “상속세 최고 세율(현행 50→40%) 인하는 ‘부자 감세’에 해당하기에 수용할 수 없다”고 전했다.

정부가 마련한 상속세제 개편안은 재계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그간 경영계에선 국내 기업 경영자들의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높은 상속세율은 기업투자 위축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해 왔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공시대상 대기업 집단의 44.9%에서 기업 경영자가 70세 이상이다.

이 때문에 정부는 상속세 최고세율을 50%→40%로 낮추고, 대기업 최대 주주에 적용하던 상속재산 할증평가(20% 가산)도 폐지하는 세제 개편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여야의 입장은 정반대다. 최형두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11일 국회 예산결산특위 전체회의에서 “투자 이민이 많이 늘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상속세 문제”라며 “세수 감소를 부자감세 탓으로 모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라고 했다. 이에 정일영 민주당 의원은 “국회예산정책처 분석으로는 상속 증여세가 향후 5년간 감소 폭이 20조 원에 달할 정도”라며 “초부자 감세는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야당은 외려 기업 이사들에게 ‘주주 충실 의무’를 지우는 상법 개정에도 착수했다. 현행 상법에선 이사가 ‘회사’에 대해서만 충실 의무를 지는데, 소액 주주 권리 보장으로 책임 범위를 넓히겠다는 취지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지난 11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상법 개정안에 대해 “정상적 기업 경영 활동까지 위축시킬 수 있다”며 잦은 배임 소송 등으로 장기 투자가 위축될 수 있다는 업계 의견을 전했다. 이에 이 대표는 “시장 투명성을 위해서 필요한 조치”라고 답했다.

일각에선 기업에 대한 세제 지원 법안이 줄줄이 야당 반대에 가로막히는 게 정부가 세수 결손 사태를 빚어 자초한 일이란 지적도 나온다. 기획재정부의 ‘국세수입 현황’에 따르면 올 1~9월 누적 국세 수입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조3000억원 줄어든 255조3000억원을 기록했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법인세 인하 기류는 세계적 흐름이라 따라갈 필요성은 있다”면서도 “다만 정부가 세수 추계조차 제대로 못 하는 상황에서 상속세·법인세를 감면한다면 어디서 벌충할 재원을 마련할지부터 답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김민정·김정재 기자 kim.minjeong4@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