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과 전통,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작은 대한민국’ 만들 것”
“SK하이닉스, 3개 군단급 군 부대 수십년간 시민들과 고락 함께해”
“기업 지원이 특혜라고? 기업이 필요로 할 때 도와주는 게 진짜 돕는 것”
“40년 된 수도권 역차별이 지자체와 반도체 산업, 나라의 발목 잡아”
반도체 칩은 이천시 자부심의 엔진이다.
올해로 세계적 반도체 제조 허브인 SK하이닉스 본사가 이곳에 자리한 지도 41년째다. 반도체 관련 소재·부품·장비 기업도 즐비하다. 이천시는 용인·평택·화성과 더불어 경기 남부권 반도체 벨트의 중핵을 이룬다.
차세대 반도체 산업을 끌어안았다고 하지만 이 도시의 양적 성장은 기대와는 달리 더딘 편이다. 2017년 20만 명을 돌파한 이천시의 인구는 2024년 현재 23만 명 선에 머문다. 이천시 전역이 ‘수도권정 비계획법’상 자연보전권역으로 지정돼 공장과 학교 신·증설에 제약을 받는 까닭이다. 1982년 이 법이 제정되기 전부터 이천에 뿌리내린 기업 중에는 시설 규제를 피해 충청권으로 빠져나갈 움직임을 보이는 곳도 있을 정도다. 수도권 남부 끄트머리에 자리해 수도권으로 분류되는 이천시에 주어진 규제의 현실은 혹독하기만 하다.
김경희 이천시장은 이런 제약 위에 새로운 현실을 창작하고자 한다. 변화는 규범을 바꿀 때 일어나는 법. 도시 발전을 가로막는 수도권정비계획법 개정에 10년 이상 공을 들이고 있다. 또 생산 활동에 필요한 제반 편의를 24시간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시스템을 갖춰 기업인들의 마음을 사고자 애쓴다. 나아가 이천시에 교육·문화·산업 기능이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작은 대한민국’을 조성, 원주민과 외지인 모두 거주에 불편함이 없는 최적의 정주 여건을 제공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김 시장은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쌀과 도자기로 유명한 이천시가 이제는 반도체 중심 도시로 주목받고 있다”면서 “이천은 전통과 첨단이 시너지 효과를 내는 글로벌 도·농 복합도시 모델로 부상하게 될 것”이라고 응전의 포부를 밝혔다.
“우리는 SK를 향토기업이라 부른다”
임해규 두원공대 총장은 경기도 부천시 국회의원과 경기도 산하 경기개발연구 원장을 역임했다. 임 총장은 “경기도 내 많은 시·군이 이천시와 같은 수도권 역차별에 따르는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면서 “글로벌 경쟁 시대에 걸맞은 법적·제도적 정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밖에서는 세계 최고 기업의 본사를 품은 이천시를 부러워할 것 같습니다.
김경희 이천시장_ “SK하이닉스를 비롯한 세계적인 반도체 관련 기업들이 이천시에 둥지를 틀고 있어요. 반도체뿐만 아니라 AI, 드론, 모빌리티, 방산 등 미래 먹거리 산업도 이천시의 주력 산업을 이룰 겁니다. 이를 위해 취임 이후 도시와 산업의 생태계 활 성화를 책임질 첨단미래도시추진단을 설치했어요. 앞으로도 할 일이 많습니다.”
임해규 두원공대 총장_ “안 그래도 최근 이천시는 현실과 똑같은 가상현실 세계인 디지털트윈 기술을 도입했더군요. 이천의 다양한 도시 문제에 대한 해법을 디지털 공간 시뮬레이션으로 찾고자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동부권 중심도시로 위상을 다져가는 이천시의 역동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농업, 산업, 안보 등 국가 핵심 기능 이천에 응축”
김 시장_ “지난 10월 10일 창립 41주년을 맞은 SK하이닉스는 이천시와 희로애락을 같이 해온 기업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향토기업이라고 불러요. 그 사이 생산라인 증설 등 많은 고난과 위기의 순간마다 우리 시민들과 하이닉스는 머리를 맞대고 갈등을 잘 헤쳐 왔습니다. 하이닉스도 23만 이천 시민들께 감사할 것이고, 시민들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천에 본사를 둔 하이닉스는 지금 고대역폭메모리(HBM3)를 통해 반도체 산업의 새 역사를 쓰고 있어요.”
임 총장_ “일본 전자산업의 쇠퇴를 보면 반도체 산업도 기업 간, 국가 간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알 수 있어요. 세계 1위라는 입지가 수시로 바뀌는 반도체 품목도 있습니다.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기업에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할 상황이 아닌 것이지요. 그러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큰 사업이 바로 반도체입니다. 중앙정부는 연구·개발 분야에 지원해야 하고, 지방 정부는 반도체 관련 기업 직원들이 편하게 살면서 자녀 교육도 가능한 환경을 제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삶의 질은 사람을 모으고, 도시의 매력을 키우는 중요한 요소겠지요?
김 시장_ 이천은 젊은 도시인 만큼 맞벌이 부부도 많아요. 급하게 아이 맡길 곳이 없어 곤란해하는 시민들을 많이 봐왔습니다. 이천시는 24시간 아이돌 봄센터를 지난 4월 전국 최초로 개소해 0세부터 12세까지, 365일 24시간 연중무휴로 아이들을 돌봐 주고 있습니다. 삶의 질은 쾌적한 도시 환경과 직결됩니다. 얼마 전 저희는 설봉공원 리모델링 작업을 완료해, 대한민국 조경 대상 국토부 장관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구도심 활성화에 큰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설봉공원에 이어지는 도심 거리와 분수대 5거리 정비 사업도 그 일환이며, 먹자골목과 연계한 안흥지 경관 조성사업은 ‘낮보다 아름다운 안흥지’라는 주제로 시민들에게 명품 야경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올 12월이면 복하천 종합생태수변공원 사업이 완료됩니다. 대규모 캠핑장과 테마숲, 잔디광장과 어린이 물놀이 시설, 카페 등을 구비한 이천의 새로운 랜드마크입니다. 첨단산업 도시이면서, 아이 키우기 좋은 도시, 쾌적한 환경의 도시, 문화와 예술이 살아 있는 도시가 바로 이천입니다.”
김 시장_ “이천은 도시와 농촌의 특징을 다 가진 도·농 복합도시이자 ‘작은 대한민국’의 속성을 가진 고장입니다. ‘임금님표’로 널리 알려진 이천 쌀은 왕조 시절 임금님께 진상한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입니다. 이천시는 이렇게 국민 식생활을 책임지는 쌀,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에다 군항공사령부·육군특수전사령부·제7기동군단 등 3개 군부대가 주둔하는 안보까지 두루 아우릅니다. 한국의 첨단농업과 첨단산업, 스마트 방위산업까지 국가의 핵심 기능이 이곳에 응축된 셈이죠. 이천시는 민·군 협력의 모범 사례이기도 합니다. 군에서는 각종 기자재를 동원해 하천 준설작업 등을 도와주기도 하고, 이천시 경제 활성화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저희도 군부대와의 소통과 협력을 담당하는 자문관을 두는 등 긴밀한 협력을 꾀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방과 후 저녁까지 초등학생을 돌보는 다함께돌봄센터를 군인 가족들이 거주하는 관사에 설치해 자녀 돌봄 편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천시는 또 유네스코 창의도시로 지정된 도자기의 도시입니다. 12만 평의 부지에 300여 개의 도자기와 공예 공방이 입주해 있는 예스파크는 명실 상부한 대한민국 최고의 도자예술마을로 통하지요. 이천이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쉬는 도시라는 이유입니다. 2024 이천국제음악제, SK하이닉스 임직원을 위한 음악회, 버스킹 공연 등 개성 만점의 수준 높은 공연을 도심 곳곳에서 접할 수 있어요.”
“규제는 수도권 난개발만 불러”
김 시장은 1973년 고졸 9급 공무원으로 출발해 이천시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일반직 첫 여성 사무관, 여성 최초 행정자치부 인사혁신팀장과 감사담당관 등을 거쳐 2020년 6월 지방선거에서 이천시장으로 선출됐다.
예컨대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과 충북 음성군 감곡면은 청미천이라는 하천을 사이에 두고 있다. 수도권의 장호원은 중첩 된 규제에 막혀 개발에 제한을 받는 반면, 비수도권 의 감곡면은 대학과 대규모 공장 등 개발이 상대적 으로 자유롭다. 수도권이라는 이유로 40년 가까이 제자리걸음만 해야 하는 장호원이 받는 역차별이 이천시 전체가 겪는 고통을 대변해준다는 게 김 시 장의 호소였다.
수도권 집중 시대에 수도권이라고 다 잘나가는 건 아니군요?
김 시장_ “제가 경기도청 비전기획관 등 국장으로 근무할 당시인 2010년 수도권정비계획법 개정의 필요성을 제기했어요. 하지만 비수도권에서 응하지 않았어요. 이천시는 시역(市域) 전체가 자연보전권역으로 지정돼 있어요. 그래서 6만㎡를 넘어서는 공업용지는 조성하지 못합니다. 평수로 따지면 1만8150평에 그쳐요, 이렇게 소규모로 입지를 조성하면 결국 난(亂)개발하라는 말밖에 더 되나요? 법 제정 전부터 이천에서 조업하던 기업도 공장 증설이 안 됩니다. 부득불 충북 등 비수도권으로 이전하기도 합니다. 이천에는 대기업도 못 들어오고, 4년제 대학 유치도 어렵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돌아가고 있어요. 타지로 이전하는 기업들은 기존 설비와 입지를 포기하는 대가를 치러야겠죠. 이런 식으로 나라와 지자체의 경쟁력은 고갈되고 있는 겁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모든 빗장을 다 풀어야 할 때입니다. 글로벌 경쟁 시대에 한국과 같이 작은 땅덩어리의 나라에서 수도권과 비수도권이 어디 있나요. 이천도 40년 동안 이렇게 묶어만 두고 있어요.”
헌법보다 개정하기 더 어려운 법(法)?
김 시장_ “그럴수록 저희 같은 지자체는 틈새 전략에 매달리게 됩니다. 이천시가 지난해 발족한 첨단 미래도시추진단이 대표적입니다. 각종 규제를 우회해 산업과 도시 기능을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기구입니다. 국무총리실 규제혁신추진단 관계자들 을 초청해 강의도 듣고, 지역의 현실과 고충을 전달하는 등 현행 제도 안에서 풀 수 있는 건 최대한 해 보려고 애를 쓰지요. 조만간 구체적인 성과도 나올 예정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발전을 멈출 수는 없잖아요.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달라붙어 해법을 찾는 과정입니다.”
“시설 규제 안 받는 온라인 대학 활용해야”
임 총장_ “학교를 책임지는 제 입장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건 수도권정비계획법이 교육기관마저 규제한다는 점입니다. 첨단산업이 있는 곳엔 인력이 공급돼야 하고, 그 인력은 좋은 대학이 양성하는 겁니다. 미국 실리콘밸리 주변에 포진한 우수한 교육 기관들을 보세요. 지금 이천시에는 인재 양성을 주도할 대학이 마땅치 않아요. 수도권정비계획법은 4년제 대학 신·증설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시설 기준을 엄격하게 정하고 있는 고등교육법을 완화한다면 지자체에 숨통을 틔울 수 있습니다. 이천시에 혁신적이라 평가받는 미국 ‘미네르바 대학’ 같은 학교를 만들 수도 있어요. 이 대학은 캠퍼스가 없는 대학으로 온라인 강의를 중심으로 하는 신개념의 대학이지요. 이런 대학을 허용한다면 국내외 유수 대학 분교가 이천시에 올 수도 있을 겁니다. 또 이천시의 숙원사업인 과학고 유치도 탄력을 받을 겁니다.”
김 시장_ “이천시는 글로벌 첨단 반도체 산업의 선도적 역할을 하는 SK하이닉스 본사와 연구소가 위치한 고장입니다. 또 반도체종합솔루션센터는 테스트 베드 역할을 합니다. 이곳에 과학고를 세우면 기초 과학 연구와 기술의 산업 현장 적용까지 일관된 시스템을 완비하게 됩니다. 이천·여주·양평·광주를 포 함한 경기 동부권에는 특목고, 자사고가 하나도 없는 실정입니다. 더구나 이천시는 수도권정비계획법의 불합리한 중첩 규제로 인해 4년제 대학 설립이 불가능합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은 더 나은 교육 기회를 찾아 대도시로 떠나기도 합니다. 이천 시민들의 열망도 과학고 유치에 집중됩니다. 한 여론조사에서 따르면 응답자 3797명 중 95.4%가 과학고 신설에 동의하기도 했어요. 또 총 2만5500여 명의 시민이 과학고 유치 서명에 동참했습니다. 이천시 각계각층 에서 ‘이천과학고 유치 릴레이 응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장의 애로 사항 처리하는 24시간 민원 기동팀
김 시장_ “저는 증설 수요가 있는 이천 소재 기업들의 신속한 인허가를 위해 항상 노력하고 있습니다. 공장 진입로나 각종 편의시설도 이른 시일 내 조성해주고 있어요. 일부 특혜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저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기업이 뭔가를 정말 필요로 할 때 도와주는 게 진짜 돕는 것’이라고요. 저는 한 달에 한두 번이라도 산업 현장을 꼭 둘러보려고 해요. 현장에 애로 사항이 있으면 24시간 민원 기동팀에게 바로 처리토록 합니다. 수도권정비계획법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일반 시민들의 민원도 즉시 처리를 원칙으로 합니다. 담당 공무원은 힘들어하지만 그만큼 보상도 따르고, 보람도 클 것이라 판단할 겁니다.”
임 총장_ “공무원은 업무 매뉴얼에 따라 일을 처리하죠. 재량권은 가급적 행사하지 않지요. 문제라도 생기면 감사를 받고, 그러면 여러 가지 불이익이 따르니까 뭐랄까, 잘 안 움직인다고 하잖아요. 김 시장께서는 역동적 리더십으로 그걸 극복해 나가는 것 같습니다. 공무원들 입장에서도 기업이 잘 되는 도시라야 재정이 확보되어 이천시가 발전할 수 있으니 합심하게 된 것 같습니다.”
용인, 평택 등 경기 남부권 반도체 벨트 지자체 간 협업도 활발한 것 같습니다.
김 시장_ “경기 남부권은 대한민국을 넘어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핵심 기지입니다. 이천은 이미 완성된 생산기지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어요. 나아가 현재 대규모 생산라인이 건설되고 있는 용인시와 긴밀히 협력하면 세계적인 경쟁력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12월에 이천, 용인 두 도시가 반도체 인재 양성에 협업하는 업무협약을 체결한 건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올해 6월에는 반도체 교통망 확충을 위 한 상생발전 협약을 맺어 두 도시 간 고속도로와 국도, 지방도 연결에 속도감을 불어넣기로 했습니다. 반도체 산업은 지역 간 경쟁이 아닙니다. 세계시장과의 경쟁입니다. 반도체 벨트의 핵심 도시들이 함께 연대하고 협력해야 경쟁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임 총장_ “대한민국의 생존과 발전은 반도체 등 첨단산업의 기술 격차를 얼마나 유지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도로·물류·교육 등 도시 인프라가 잘 갖춰져야 반도체 생태계도 제대로 작동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반도체 부분은 국가나 지자체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규제를 완화하여 학생을 키우고, 기술인력을 양성하는 조치가 절실합니다.”
- 박성현 월간중앙 지역전문위원 park.sunghyun@joongang.co.kr / 사진 최영재 기자 choi.yeongja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