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땐 우향우, 빠져 죽어라" 이랬던 철강왕 눈물의 한마디

추천!더중플 - 분노의 철강왕, 박태준
 오늘의 '추천! 더중플'은 철강왕 박태준(1927~2011) 포스코 명예회장의 회고록 '쇳물은 멈추지 않는다'(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23)입니다. 박 명예회장은 국무총리를 지냈고 포스코(POSCO)를 일궜지만 집 한 채 남기지 않고 떠났습니다. 제철보국(製鐵報國·철을 만들어 나라에 보답한다)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거인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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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값으로 짓는 제철소, 실패하면 우향우”

1968년 11월 포항제철 건설현장 사무소(롬멜하우스)로 현지 시찰을 온 박정희 대통령(앞줄 맨 오른쪽)을 안내하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점퍼 차림). 박 대통령은 허허벌판을 보며 ″박사장, 이거 어디 되겠나″라며 걱정했다. 중앙포토

1968년 11월 포항제철 건설현장 사무소(롬멜하우스)로 현지 시찰을 온 박정희 대통령(앞줄 맨 오른쪽)을 안내하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점퍼 차림). 박 대통령은 허허벌판을 보며 ″박사장, 이거 어디 되겠나″라며 걱정했다. 중앙포토

박태준 회장이 팔뚝 길이만 한 지휘봉을 들고 제철소 현장에 뜬 날이면 모두가 덜덜 떨었다.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지적하는데 그게 너무 정확해 모두가 꼼짝하지 못했다. 야간근무를 하던 중에 졸다 걸리면 옷 벗을 각오를 해야 했다. 그러는 사이 박 회장의 지휘봉은 직원들의 안전모를 향해 사정없이 내리쳐졌다.

그도 그럴 만했다. 기술도, 돈도 없는 우리나라가 영일만 모래사장 위에 제철소를 짓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1966년 미국·서독·영국·이탈리아·프랑스 등 5개국 8개 회사가 참여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을 구성해 자금 지원을 끌어내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대일청구자금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이때 나온 것이 포스코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우향우 정신’이었다. 박 회장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지금 건설하는 제철소는 조상의 핏값(대일청구자금)으로 짓는 것이다. 실패하면 ‘우향우’해서 영일만 앞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1호기 공사가 시작됐고, 예정보다 일정을 1개월 앞당긴 1973년 6월 9일 마침내 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해 포항제철은 매출액 1억 달러, 순이익 1200만 달러(약 46억원)를 달성했다. 포항제철은 세계 철강 역사에서 제철소를 가동한 첫해부터 이익을 낸 유일한 기업이 됐다.

“우리는 후세 위해 희생하는 세대” 

 2011년 9월 19일 경북 포항시 남구 지곡동 포스코 한마당체육관 입구, '철강왕' 박태준이 과거 함께 근무하던 현장근로자 400여 명과 만남을 앞둔 순간이었다. 단상 위에 박 회장이 섰다. 그의 입가가 떨리기 시작했다. 10여 초가 흘렀다. 기어이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버린 직원들이 어찌할 줄 몰라 하다 이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제야 호랑이 회장님의 첫마디가 터졌다.


미안합니다….
“보고 싶었소! 뵙고 싶었습니다. 재회” 행사에서 눈물짓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중앙포토

“보고 싶었소! 뵙고 싶었습니다. 재회” 행사에서 눈물짓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중앙포토

 
그리고 이어지던 말.   
“여러분 뵈니까 눈물부터 나옵니다.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중략) 우리가 영일만 모래벌판에서 청춘을 보내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지만 우리는 후세들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 희생하는 세대였습니다. 대한민국이 눈부신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동력은 여러분의 피땀이었습니다.”

박 회장은 이날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하지만 이 자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록됐다. 석 달 뒤인 12월 14일 신촌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박 회장은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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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소 실패땐 빠져 죽어야” ‘철강왕’ 박태준 우향우 정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6589

"부실공사는 적대행위" 불같이 화낸 박태준

1970년 4월 1일 오후 3시. 꼬박 10년을 표류한 끝에 드디어 포철 착공식이 열렸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갔다. 박태준은 영일만 현장에서 모든 곳을 샅샅이 살피고 다니는 '일선 소대장'이었다. 72년 5월 어느 날,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기초공사가 제일 중요한 제강공장 건설현장에서, 박아둔 파일 안으로 콘크리트를 쏟아붓는데, 파일이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야 인마, 조상들의 핏값인데 이따위로 부실공사를 해? 부실공사는 곧 적대행위야! 쇳물이 잘못 쏟아지면 바로 우리 동료가 죽거나 다쳐!” 
그의 지휘봉이 사정없이 현장소장의 안전모를 내리쳤다. “여기, 일본 회사 책임자도 나와!” 최종 책임을 맡은 일본 설비공급 업체의 현장감독이 앞으로 나왔다. 박태준은 사정없이 일본말로 퍼부었다. “이 나쁜 놈아! 너희 나라 공사도 이런 식으로 감독하나!” 내 지휘봉은 일본인 감독의 안전모에도 매섭게 떨어졌다.

“니네 나라거도 이따위로 짓냐” 日 현장소장 안전모 내리쳤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91709 

경영원칙 '목욕론' 희화 하자 버럭

1974년 12월 초, 박태준은 임원회의를 시작하자마자 버럭 고함을 질렀다. 삽시간에 회의실은 꽁꽁 얼어붙었다. 지금은 폐간된 포철 사보인 ‘쇳물’ 11월·12월 합본호가 사원들에게 배포되기 직전이었다. 사보에 실린 '올해의 어글리 10대 뉴스'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직원 부인들도 목욕을 잘 시키라는 사장님의 지시가 내려왔다. 드디어 가정생활에까지 간섭이 시작됐다는 ‘비관형’에다, 우리 마누라 몸에 때 있는 걸 사장님이 언제 보셨느냐는 ‘의처증형(?)’까지….” 

그가 그토록 화를 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때 포철은 1기 103만t을 완성한 뒤 2기 건설에 매진하고 있었다. 누가 제2 제철을 맡느냐를 놓고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사장님, 내 마누라 때 봤나?” 박태준, 포철 사보에 버럭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9169

고교생 딸 앞에서 가택수색, 박태준은 사표를 던졌다  

정부가 추진하는 '제2 제철'인 '한국제철'을 보며 박태준은 속앓이를 했다. 이제 겨우 제철 전문가를 육성하기 시작한 마당에 두 집 살림을 하면 모두 부실해질 것은 뻔한 이치였다. 태완선 전 부총리가 한국제철을 창립하던 1974년 가을, 박태준은 개인적으로 곤욕을 치렀다. 서울 북아현동 집이 가택수색을 당한 것이었다. 그날 아침 고2 맏딸이 등교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대통령이 포항에서 쉬어간다는 연락이 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이, 박태준은 경호실장 박종규에게 마구 퍼부었다. 

“사람을 모래벌판에 처박아 놓고 독약 먹일 음모나 꾸며?”  

모래벌판 처박고 독약 먹여?” 딸 앞에서 압색, 사표 던졌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