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생산을 규제하자는 전인류적 합의가 무산됐다. 1일 오후 7시30분부터 다음날 오전 3시까지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국제 플라스틱 협약 5차 회의(INC-5)는 플라스틱 생산량을 줄이는 방안을 7시간 가량 논의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폐막했다. 다음 회의는 내년에 열린다.
최종 회의는 루이스 바야스 발비디에소 INC 의장의 5차 제안서가 채택되며 시작됐다. 이 제안서의 6조 1항에는 “다음 회의에서 플라스틱 폴리머의 생산과 소비를 감축하는 전 세계적 목표를 채택한다”는 내용이 포함돼있다.
1항 문안을 구성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협상 대상이었는데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산유국은 ‘생산 감축’ 문구를 포함하는 어떤 문안에도 합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했다고 한다. 반면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175개 당사국 가운데 유럽연합(EU)을 포함한 100개국 이상이 파나마가 제출한 생산 감축 제안서를 지지했다. 이들은 생산 감축 없이는 플라스틱 오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결국 협상은 결렬됐다.
옵저버(observer·협약 진행 과정 감시하는 시민)로 협약에 참여한 국제 환경단체 그린피스의 그레이엄 포브스 INC-5 대표단장은 “100개 이상 국가가 생산 감축 지지를 표명한 점은 고무적이지만 협약 초안은 여전히 명확한 로드맵을 제시하지 못하고, 다양한 선택지로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환경운동연합은 “협상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개최국이자 플라스틱 협약 우호국 연합(HAC) 소속인 한국 정부도 매우 실망스러운 행태를 보였다”며 “‘생산감축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환경부 장관의 발언과는 달리 협상 중 감축을 제안하는 제안서에 단 한 번도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원유 수출 감소한 사우디, 꿈쩍도 안 했다
플라스틱 협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돈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다. 반대를 주도한 사우디아라비아의 플라스틱과 고무 제품 수출액은 2022년 기준 238억달러(약 33조)다. 총 수출액의 약 5.8% 규모다. 정확한 수치가 공개되진 않았지만 지난해 사우디아리바이아의 플라스틱과 고무 제품 수출은 전년보다 1% 증가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플라스틱 생산 규제는 사우디의 원유 수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중국ㆍ인도ㆍ한국ㆍ일본 등 원유가 나지 않는 나라에서는 플라스틱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원유를 수입하고 있다.
다수결 결정?…지원책 강화한 패키지딜 논의 가능성도
유엔환경계획(UNEP)은 당초 최종 합의문을 도출하기로 했던 5차 부산 회의를 5.1차 회의로 명명하고, 내년 중 5.2차 회의를 열어 협의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시기와 장소는 미정이다.
협상장에서는 만장일치가 아닌 투표로 협약문을 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당장 UNEP이 그동안 이어져 온 협상 방식을 다수결로 바꿀 확률은 높지 않다.
다음 회의에서 선진국이 태평양 군소 도서 지역을 향한 재정 지원을 확대해, 생산 감축 문구에서 한 발 물러나는 ‘패키지 딜’을 제안할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한국과 미국ㆍ캐나다ㆍ호주ㆍ노르웨이ㆍ일본 등이 포함된 (대부분의 유럽을 제외한) 선진국 그룹(주스칸스 회의)에서 이런 내용을 포함한 ‘패키지 딜’로 다음 협약을 성안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회의에서 나오면서다.
익명을 요청한 정부 당국자는 “양쪽 모두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이라서, ‘생산 감축’ 문구를 다소 완화해 합의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선진국 그룹에서 규제와 지원책을 묶은 ‘패키지 딜’이 언급된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