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웅 지음
휴머니스트
“태황제(고종)가 이토 히로부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에 크게 기뻐하는 표정이 나타나며 잠깐 동안 웃고 이야기를 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1909년 10월 26일)과 관련해 황현의 『매천야록』이 기록한 대목이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사실처럼 썼다. 고종에 대한 반감이 강한 황현이었지만, 이토의 죽음을 놓고 자신과 고종의 감정이 동일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담은 듯하다. 황현은 1910년 8월 대한제국의 주권이 일제에 강탈당하자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했다. 『매천야록』은 1864년 흥선대원군 집권 이래 1910년 일제의 한국 병합까지의 근대사 기록을 담고 있다.
재야의 선비 황현과 달리 도시의 식자층으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정교는 『매천야록』과 비슷한 기간 동안의 근대사를 기록한 『대한계년사』를 남겼다. 정교는 여기서 “안중근은 낯빛이 태연한 채 끊임없이 웅변하며 수 시간 큰 소리로 진술했다. 모두 더할 수 없이 슬프고 끔찍하면서도 기개가 있는 이야기로, 차마 다 적을 수가 없다”며 안중근의 최후진술을 전하면서 자신의 마음도 함께 실었다.
황현의 『매천야록』과 정교의 『대한계년사』는 정사(正史)가 아닌 야사다. 정사인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가 편찬한 점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된 내용을 실었을 가능성이 크다. 21세기에 와서도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는 구한말 대한제국 시대의 역사를 제대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고종, 순종실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김태웅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펴낸 『그들의 대한제국 1897~1910』은 황현, 정교 등 구한말 살았던 5명이 남긴 일기와 기록을 토대로 그때 당시를 재구성한 책으로, 흠결 있는 정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다채로운 역사를 접할 수 있다. 이 책은 1880년대부터 1940년까지 60여 년에 걸쳐 쓴 윤치호의 ‘윤치호일기’, 프랑스 신부 귀스타브 뮈텔이 조선교구장 주교가 된 1890년 8월 4일부터 1933년 1월 14일까지 무려 42년간 쓴 ‘뮈텔주교일기’, 도자기를 생산하고 조달하는 공인으로서 양반 출신이 아닌 일반인의 눈으로 1891년 1월~1911년 윤6월까지 당시에 벌어졌던 역사적 사건과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기록한 지규식의 ‘하재일기’ 내용도 상세히 소개한다.
윤치호, 황현, 정교, 뮈텔, 지규식 5인의 기록은 흥선대원군의 정책부터 근대화 정책,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명성왕후 시해 사건, 단발령, 아관파천, 대한제국 수립, 을사늑약, 일제의 한국 합병 등 근대사의 거의 모든 장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일제가 편찬한 정사만으로 부족함을 느끼는 독자들에겐 역사의 빈 공간을 채워 줄 수 있는 훌륭한 사료들이 될 수 있다. 물론 이 또한 그들 5인의 한정된 시각과 주관적 역사관이라는 단점이 있지만 『그들의 대한제국 1897~1910』은 그런 함정까지 잘 커버하고 있어 읽다가 혹시나 길을 잃어버릴 우려는 크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