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이른 아침, 클라우디아 셰인바움(62) 멕시코 대통령은 생중계 기자회견을 연다. 이 자리에서 그는 국정 운영 계획을 밝히고, 기자단의 질문도 받는다. 로페스 오브라도르(71) 전 대통령이 만든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멕시코에선 이런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마냐네라(일찍 일어나는 사람)'라고 부른다.
셰인바움이 요즘 기자회견에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트럼프발 관세 폭탄'에 관한 것이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에 맞서기도, 달래기도 하는 발언으로 멕시코에 돌아오는 피해를 최소화하려 애쓰는 모습이다.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이 지난 4일(현지시간) 오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취임한 지 갓 두 달을 넘긴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이 주목받고 있다. 멕시코 200년 헌정사상 첫 여성 대통령인 데다, 취임 초기부터 '25% 관세 부과'를 예고한 트럼프를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셰인바움은 지난달 26일(현지시간) 트럼프를 향해 "(멕시코에) 관세를 부과하면, (우리의) 관세 조치가 이어질 것"이라며 '관세 보복'을 경고했다.
그러다 이틀 뒤 "중국 전기차 업체 비야디(BYD)가 멕시코에 공장을 여느냐"는 기자의 질문엔 "확인한 바 없다"며 선을 그었다. 중국산 전기차의 멕시코 우회 수출 문제를 제기해 온 트럼프를 의식해 중국과 거리 두기를 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셰인바움(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 AFP=연합뉴스
트럼프는 지난달 25일 "취임 즉시 행정명령을 통해 멕시코와 캐나다에서 수입하는 모든 제품에 25% 관세를 매기겠다"고 한 바 있다. 두 나라가 불법 이민과 마약성 진통제 펜타닐의 유입 경로란 이유를 댔다.
그러자 셰인바움은 트럼프와 전화 통화해 "미국·멕시코 국경 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하겠다"며 트럼프를 안심시키려고도 했다.
좌파 성향 모네라당 소속 셰인바움은 지난 6월 여성으로선 최초로 멕시코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이제 여성을 위한 시간이다"란 선거 구호로 남성우월주의에 염증을 느낀 멕시코인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셰인바움은 명문 멕시코 국립자치대(UNAM)에서 환경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엘리트 과학자 출신이다. 유대인인 그의 부모도 과학자로 반정부 시위에 적극 참여한 좌파 성향이었다고 한다. 셰인바움도 대학생 시절 등록금 인상 반대 시위에 앞장섰다.
지난 17일 민항기를 탄 셰인바움의 모습. 사진 X 캡처
셰인바움을 정치로 이끈 건 전임 대통령 오브라도르다. 2000년 당시 멕시코시티 시장이었던 오브라도르는 그를 멕시코시티의 환경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셰인바움은 임기를 마친 후 학계로 돌아가 기후변화 연구에 매진하다 2018년 멕시코시티 시장에 당선되며 '오브라도르의 후계자'로 급부상했다. 그는 좌파 성향 정치인 카를로스 이마즈와 이혼 후 지난해 금융 전문가와 재혼했다. 주변인들은 셰인바움에 대해 "위기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셰인바움은 취임 초기부터 '오브라도르의 길'을 가고 있단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멘토인 오브라도르처럼 '마냐네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브라도르의 퇴임 무렵 지지율이 70%에 육박했던 비결로 그가 재임 중 매일 아침 한 기자회견이 꼽힌다. AFP통신에 따르면 오브라도르는 매일 기자회견을 한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대통령으로 그가 재임 중 한 기자회견은 1438회에 달한다.
지난 2일 기자회견 중인 셰인바움. AP=연합뉴스
또 셰인바움은 지난달 17일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린 브라질로 가기 위해 민항기 이코노미석에 탑승해 화제가 됐다. 이 역시 예산 절감을 위해 대통령 전용기를 팔고 국내외 출장 때마다 민항기를 이용한 오브라도르의 원칙을 이어받은 것이다.
하지만 오브라도르와 다른 '셰인바움 스타일'도 있다. 오브라도르는 과거 기자회견에서 정부 비판 기사를 쓴 기자를 공격하곤 해 논란이 됐고, 매일 기자회견에서 2시간 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 위주로 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이와 달리 셰인바움의 마냐네라는 "전임자보다 더 간결하면서 덜 공격적"이란 평가다.
지난 10월 1일 멕시코 대통령 취임식에서 셰인바움의 손을 들어주는 전임 대통령 오브라도르(오른쪽). AFP=연합뉴스
또 그는 "남녀 임금 격차를 없애는 내용을 헌법에 명문화하겠다"고 발표하는 등 취임하자마자 여권 신장에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멕시코 경쟁력 연구소에 따르면 멕시코에선 같은 일을 하고도 남성은 시간당 100페소(약 2400원), 여성은 65페소(약 1600원)를 벌고 있다.
셰인바움이 오브라도르와 차별화된 또 다른 하나는 외교다. 오브라도르가 해외 정상과의 회담에 소극적이었던 반면 셰인바움은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조 바이든 미 대통령,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 여러 정상들과 회담했다.
지난달 18일 G20 정상회의에서 셰인바움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과 악수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그러나 동시에 셰인바움에겐 '오브라도르의 그림자'가 짙다는 지적도 따라다닌다. 에너지 분야에 대한 정부 통제권 강화, 판사를 국민 투표로 뽑는 '판사 직선제' 등 논란이 된 전임 정부의 정책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각각 민간 투자를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해친다는 비판을 받은 정책들이다. 멕시코의 높은 빈곤율(36%)과 저성장, 높은 여성 대상 범죄율도 그에게 놓인 난제다.
무엇보다 고율 관세를 추구하는 트럼프의 재집권이 그에게 악재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정치 컨설턴트 카를로스 라미레즈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트럼프가 관세 25% 부과를 실행할 경우 멕시코 경제가 큰 영향을 받는 만큼 셰인바움에겐 정치적 위기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