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속에 깃든 시간과 손길의 흔적...구본창 작가의 '사물의 초상' [더 하이엔드]

ACC 포커스 기획전, 구본창 '사물의 초상' 전경. 규모가 큰 공간의 장점을 활용해 위아래로 시선을 옮기며 작품을 관람할 수 있게 연출했다. [사진 ACC]

ACC 포커스 기획전, 구본창 '사물의 초상' 전경. 규모가 큰 공간의 장점을 활용해 위아래로 시선을 옮기며 작품을 관람할 수 있게 연출했다. [사진 ACC]

 
10m 높이 천장에는 백자가 족자처럼 드리워졌고, 금관은 지금 막 출토된 것처럼 바닥에 누운 장관이 펼쳐졌다. 지난 11월 22일부터 내년 3월 30일까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ACC)에서 열리는 구본창 사진가의 ‘사물의 초상’ 전시 풍경이다. ACC의 기획 전시 시리즈인 ‘ACC 포커스’는 올해부터 인류 문화예술의 틀을 바꾼 아시아 현대미술 거장을 소개한다. 첫 번째 주인공은 현대 시대상부터 사물을 통한 순수 예술 영역까지 폭넓게 아우르는 구본창 작가다.

ACC 이강현 전당장은 “최근 구본창 작가의 회고전이 열렸던 만큼 차별점을 두고자 했다”면서 “이번 전시는 작가의 주요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물 연작에 초점을 맞췄다"고 밝혔다. 사물에 깃든 한국적 정서를 살펴볼 수 있는 작품부터 구 작가가 오랜 시간 애정을 가지고 수집한 소장품까지 다양한 사물의 초상을 만날 수 있다.

대표작 중 하나인 '백자(vessel)' 연작은 2004년부터 국내외 16개 박물관에 소장된 백자를 촬영한 작품이다.

대표작 중 하나인 '백자(vessel)' 연작은 2004년부터 국내외 16개 박물관에 소장된 백자를 촬영한 작품이다.

 

숨결을 입히다

“내가 찍은 사진들은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전시장에서 만난 구 작가는 초연했다. 말할 듯 말 듯 숨겨진 이야기를 건네는 사진 속 정물의 기품과 닮은 듯했다. 사물이 지닌 의미와 그에 얽힌 이야기에 천착해 온 작가는 드러난 것보다 가려진 것에 관심을 두고 삶의 흔적을 기록해 왔다. 이번 전시는 주요 연작을 통해 사물의 서사와 그 안에 깃든 한국 정서에 주목했다. 해외에 반출되어 고국 땅을 밟지 못하는 백자들을 찾아 찍은 ‘베셀’ 시리즈는 외형적 형태보다 내면에 흐르는 깊고 단아한 감성을 파고들었다. 

이번 전시에서 최초로 공개하는 '코리아 판타지'는 우리나라 4대 고궁의 단청을 작가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사진 ACC)

이번 전시에서 최초로 공개하는 '코리아 판타지'는 우리나라 4대 고궁의 단청을 작가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사진 ACC)

 
신라 금관을 촬영한 ‘골드’ 연작을 통해서는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는 권력을 향한 욕망을 탐구했다. 특히 단청에 숨겨진 리듬감을 만화경으로 표현한영상 작품 ‘코리아 판타지’를 최초로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한국 문화에 관한 관심은 언제부터였을까. “79년 베를린 유학 시절 때다. 박물관에서 일본·중국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초라한 한국관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한국 문화는 무엇인가, 그 가치를 찾아내야겠다는 경각심은 그때부터 생겼다.” 치열한 사진가 생활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을 무렵인 2000년대부터 작가는 탈·꼭두·백자처럼 한국의 역사와 이야기가 담긴 사물들을 찍기 시작했다.

꼭두는 전통 장례에서 망자의 여정을 함께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작가는 꼭두의 거칠게 표현된 얼굴과 형태가 한국 정서를 나타낸다는 점에 주목했다. [사진 ACC]

꼭두는 전통 장례에서 망자의 여정을 함께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작가는 꼭두의 거칠게 표현된 얼굴과 형태가 한국 정서를 나타낸다는 점에 주목했다. [사진 ACC]

 

발견하다

하지만 작가가 역사 속 유물에만 관심을 두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남들은 지나쳐 버리는 사소한 물건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주목했다. 쓰고 닳은 비누, 무의식적으로 반복된 색연필의 흔적, 내용물을 빼낸 수저 상자 등 일상에서 발견한 삶의 궤적이다. “‘인간과 사물이 얽혀 역사를 만든다’라는 한 철학가의 말을 좋아한다. 사물의 존재는 결국 만들고 사용했던 사람들의 손길이다. 아무리 진귀한 도자기라도 방금 공장에서 만든 거라면 찍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 거다.”  

작가는 15세기 이후 프랑스 건축양식에서 나타난 샤스루가 마차에 치이고 부딪혀 생긴 세월의 흔적을 발견했다.

작가는 15세기 이후 프랑스 건축양식에서 나타난 샤스루가 마차에 치이고 부딪혀 생긴 세월의 흔적을 발견했다.

 
파리에서 그는 건물 모퉁이나 문 앞에 놓인 ‘샤스루’에 시선이 갔다. 15세기 이후 등장한 샤스루는 원래 마차 바퀴로부터 건물이나 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구조물이다. 정작 프랑스 사람들은 잘 모르던 각양의 샤스루가 사진에 담겼다. 이 중 12점은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아 파리 카르나발레 박물관에 소장됐다.

마주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비누 연작 실물은 물론 오랜 시간 작가가 수집해 온 소장품을 직접 볼 수 있어 특별하다. 조향 작가 한서형과 함께 비누 작품을 재해석한 조향 연출이나 영상·편집물 아카이브를 통해 작품의 이해를 돕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동선의 마지막은 인물 초상화로 맺는다. 배우 안성기, 소설가 박완서 등 익숙한 얼굴들 사이에 최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20여 년 전 모습도 있다. 정물을 초상처럼, 초상을 정물처럼 찍는다는 작가의 표현처럼 인물의 또 다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사진들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피사체가 되었던 작가의 수집품, 대중매체와의 협업 작품 등 작품 세계의 이해를 돕는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를 소개한다. [사진 ACC]

이번 전시에서는 피사체가 되었던 작가의 수집품, 대중매체와의 협업 작품 등 작품 세계의 이해를 돕는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를 소개한다. [사진 ACC]

 

아름답다는 건 보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어떤 것이 좋다고 할 수 없다. 다만 나는 엄숙함이나 숭고함, 침묵하기 때문에 느껴지는 힘을 사진으로 전달할 때 (피사체가) 조금씩 살아난다고 느낀다.
 
사물은 말이 없다. 세상을 향해 가만히 응시할 뿐. 섬세하고 사려 깊은 시선이 머무를 때, 셔터를 누른 순간이 형상보다 본질을 향할 때 비로소 사물에 깃든 이야기가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