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방관'으로 5년만에 돌아온 곽경택 감독은 홍제동 화재 참사를 다룬 이 영화로 가장전하고 싶었던 감정을 "소방관 시선으로 현장에 들어간 듯한 '두려움'"이라고 말했다. 그를 지난달 28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 바이포엠 스튜디오
“관객에게 전달하고픈 가장 강력한 느낌은 ‘두려움’이죠. 소방관의 시선으로 현장에 들어간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2001년 서울 홍제동 화재 참사를 담은 영화 ‘소방관’(곽경택 감독)이 박스오피스 선두권을 달리고 있다. 8일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4일 개봉한 ‘소방관’은 전날까지 나흘간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2’를 제치고 흥행 정상에 오르며 누적 관객 50만 명을 기록했다. 신파를 덜고 화재 진압 현장의 체험감을 부각한 게 통했다는 분석이다.
곽도원 음주운전, 팬데믹 악재 "4년 족쇄 풀었죠"
촬영을 마친 뒤 4년이나 묵힌 창고 영화의 반란이란 말도 나온다. ‘소방관’은 코로나19 팬데믹에 주연 배우 곽도원의 음주 운전(2022), 투자배급사 교체 등 악재가 겹치며 공개가 미뤄져왔다.
지난달 말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곽경택(58) 감독은 “‘소방관’은 저를 많이 반성하고 겸손하게 만들어준 작품”이라면서 “4년 간의 족쇄를 풀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소방관’ 연출을 한 차례 고사했다. 전작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2019)에서 학도병의 희생을 다룬 데 이어 소방관의 희생을 영화화하는 게 부담돼서다. “이런 이야기도 한번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작자의 말이 소방관의 헌신에 대한 부채의식을 건드리면서 메가폰을 들게 됐다.
'소방관' 실화 사건 유족 인터뷰 안 한 까닭
영화 '소방관'은 2001년 홍제동 화재 참사 실화를 토대로 하되 등장인물은 모두 재창조했다. 배우 주원(오른쪽)과 곽도원이 각각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신참 소방관, 전원 구조 철칙을 중시하는 베테랑 구조반장 역할로 영화의 중심축을 이루지만, 곽도원은 음주운전 사건으로 이번 영화의 모든 홍보사진 및 홍보활동에 빠지게 됐다.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홍제동 화재는 서울 서부소방서 소방관 6명이 순직하고 3명이 중상을 입은 대형 참사다. 방화복‧장갑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소방관의 열악한 근무 환경이 개선되는 계기가 됐다. 영화는 실화 사건에 충실하되, 인물들은 재창조했다.
곽 감독은 ‘장사리’를 비롯해 '친구'(2001), '극비수사'(2015), '암수살인'(2018, 각본·제작) 등 실화 영화만 다섯 편째다. “실화 소재로 법적 분쟁 경험도 다수 해봐 ‘소방관’은 최대한 고민했다”는 그는 “유족 인터뷰는 처음부터 할 생각을 안 했다. 대신 제작사 대표, 프로듀서가 직접 찾아가 영화화 동의를 구했다. 소방청 동의도 받았다”고 설명했다.
화재 재난 고전 '분노의 역류'…연기로 차별화
영화 '소방관'은 촬영장에 실제 불과 연기를 피워, 배우들의 얼굴을 다큐멘터리처럼 좇으며 촬영했다. 실제 영화 화면은 홍보용 영화스틸보다 어두운 편. 곽경택 감독은 순제작비 93억원 중 20억원 남짓으로 화재장면을 표현해야 했던 압박감도 컸다고 했다. 제작비 절감을 위해 장례식 등 군중신의 보조출연자를 최소화하고 디지털 캐릭터로 대체했다. .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소방관’은 연기의 공포를 극대화해 차별화를 꾀했다. 곽 감독은 “기존 화재 영화는 연기보다 불에 치중했다”면서 “연기로 꽉 채워진 와이드샷의 공포감과 카메라가 배우 눈앞까지 다가간 클로즈업을 촬영 기준으로 세웠다”고 말했다.
영화 초반 빌라 화재신에서 연기로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위협감을 그렸다면, 마지막 상가 화재신은 살갗이 데일 듯한 열기, 건물 붕괴 요소를 더해 화염의 파괴력을 끌어올렸다. "연기를 원하는 농도로 통제하기 어려워 NG가 많았다"면서 "연기 탓에 눈이 보이지 않아 당황하는 배우의 표정, 불 온도를 느끼며 달라지는 걸음걸이를 담기 위해 실제 불과 연기를 피우며 촬영했다"고 했다. 안전과 고증을 위해 촬영장엔 비번 소방대원이 상주했다.
장비들의 탄내 탓에 매캐한 악취로 가득한 소방서, 민간보험 가입이 쉽지 않은 현실 등 소방관의 고충도 담았다. “순직 동료의 방화복을 못 버리고 자기 사물함에 보관한 소방관의 일화도 실화에서 따왔죠. 원형 탈모가 오기도 하고, 현장에서 구조한 강아지들을 거둬 키우기도 합니다. 각각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소방구조대원의 입장을 전하고 싶었죠.”
영화의 토대가 된 2001년 3월 4일 일요일 새벽 3시 47분께 서울 서대문구 홍제1동 주택에서 발생한 화재 참사 현장. 화재 진압 중 붕괴한 건물에 매몰된 한 소방관이 동료 소방관들에 의해 무너진 건물더미 속에서 구조되고 있다. 소방관 6명이 순직한 대형 참사였다. 이후 밝혀진 사건 진상은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다. [중앙포토]
영화는 친형 같은 동료를 잃은 상처에 시달리는 신입 소방관 철웅(주원)과 전원 구조 철칙 속에 현장의 ‘감’을 중시하는 베테랑 구조반장 진섭(곽도원) 간의 갈등이 주축이다. 곽 감독은 곽도원의 음주운전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도, “음주 장면은 손질했지만, 진섭이 혼자 노래방에 간 장면은 당시 현장 생존자 분이 스스로를 치유한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빼지 못했다”고 말했다.
의대 중퇴 감독 된 곽경택에 부친 딱 2가지 말했다
‘소방관’은 유료 관람객 티켓 금액당 119원을 소방관 장비 및 처우 개선을 위해 현금 기부하는 기부 챌린지도 진행한다. 또 영화사가 관객 100만명 도달시 1억 1900만원, 손익분기점 250만명 돌파시 3억원 현금 등을 내년 개원 예정 국립소방병원을 위해 내놓는 공약을 내걸었다.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소방관의 헌신이 묵직한 여운을 남기지만, 인물과 사건 묘사 방식이 투박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곽 감독은 2년 전 고인이 된 아버지의 조언을 언급했다. 의대 중퇴 후 뉴욕대 영화연출과를 나와,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아들에게 부친은 “좋은 이야기를 하라. 또 네 손에 들어오는 이야기를 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곽 감독은 “내 스타일이 더 이상 안 먹힌다고 하더라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개봉 전 소방관 대상 시사회 때 실제 현장에 계셨던 분께 ‘어떻게 보셨냐’고 물었더니 ‘감동적으로 봤다’고 답해 주셨죠. 그 안에 많은 의미가 내포돼 있는 것 같아 그저 감사했습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