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위기의 서울과 파리
2024년 12월 4일 파리, 정치적 대혼란이 벌어졌다. 미셸 바르니에 총리가 이끄는 프랑스 내각이 국회에서 불신임안이 통과되며 붕괴했다. 긴축 정책을 둘러싼 좌우 극단 세력의 반발이 주요 원인이었다. 지난 6월 유럽의회 선거 당시 의회를 해산하며 정치적 도박을 했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좌우 극단 세력이 혼란을 선택했다”고 비판하며 새 총리를 임명하고 예정대로 임기를 마치겠다고 밝혔지만, 정치적 고립은 더욱 심화됐다.
한국·프랑스 정치 위기의 기묘한 닮은꼴, 대통령제 본질적 취약성 노출
성숙된 민주주의 체제라도 리더십 부재, 소통 부족, 부패에 여전히 취약
서구 민주주의의 동시다발적 위기…끊임없는 진화와 혁신 필요성 보여줘
질서 있고 신속한 민주주의 복원력 보이고 새로운 도덕적 리더십 갖춰야
성숙된 민주주의 체제라도 리더십 부재, 소통 부족, 부패에 여전히 취약
서구 민주주의의 동시다발적 위기…끊임없는 진화와 혁신 필요성 보여줘
질서 있고 신속한 민주주의 복원력 보이고 새로운 도덕적 리더십 갖춰야
한국의 경우 대통령의 권한이 과도하게 집중돼 의회와의 협력이 부족할 때 정치적 위기가 쉽게 찾아오고, 반대로 대통령의 권한이 의회에 비해 약화될 때에도 정치적 교착이 발생한다. 프랑스의 이원집정부제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의 요소를 공유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 구조가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들 체제는 강력한 리더십을 보장하지만, 동시에 권력 남용과 정치적 교착 상태를 초래할 위험을 항시 내포하고 있다.
기묘하게 닮은 한국·프랑스 대통령
8년 전 2016년 12월은 마찬가지로 두 나라에 긴장된 겨울을 알렸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연이은 스캔들과 경제적 실패로 지지율이 추락했다. 세금을 회피했다는 의혹과 사생활 논란이 그의 리더십을 갉아먹었고, 경제 불황 속에서 뚜렷한 돌파구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프랑스 국민의 실망이 극에 달했다. 2016년 12월 1일 올랑드 대통령은 지지율이 역대 최저치인 4%까지 떨어진 상태에서 대국민 담화를 통해 재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치 무대에서 스스로 퇴장했다. 이는 프랑스 정치사에서 현직 대통령이 관습처럼 되어 온 재선 출마를 스스로 포기한 초유의 일이었다.
같은 시기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지지율이 5%까지 떨어지며 정치적 몰락을 겪었다. 비선 실세라는 존재와 국정 전반에 걸친 부패와 불투명한 의사결정 과정은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2016년 12월 9일 국회는 압도적인 표차로 탄핵소추안을 가결했고, 2017년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으로 최종적으로 대통령직을 박탈했다. 박근혜와 올랑드 대통령의 정치적 몰락은 같은 시기에 국민적 신뢰 상실의 공통된 배경 속에서 벌어졌다.
앞서 2007년, 2008년에 각각 집권한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과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은 모두 경제 개혁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우며 등장했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2007년 취임 후 야심 찬 경제 개혁을 시도했지만, 대중과의 소통 부재와 부패 논란으로 지지율이 임기 말 20%까지 하락했다. 이명박 대통령 역시 친기업 정책과 4대강 사업을 추진하며 경제 성장을 강조했지만, 환경 문제와 부정 논란으로 국민의 반발을 샀다. 그의 지지율 역시 임기 말 20%대에 머무르며 프랑스 대통령과 유사한 궤적을 보였다.
정치적 초강수가 신뢰 상실 가속화
윤석열과 마크롱 대통령은 모두 정치적, 경제적 위기 속에서 대중의 신뢰를 잃으며 점점 더 강경한 결단을 내리는 악순환에 빠졌다. 두 사례는 성숙된 민주주의 체제일지라도 리더십 부재와 소통 부족, 그리고 부패에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주는 데칼코마니와도 같다.
민주주의 위기 사례는 단지 두 나라에 국한되지 않는다. 독일에서는 올라프 숄츠 총리가 예산 정책 갈등으로 연립정부 붕괴를 경험하며 조기 총선을 준비 중이다. 극우 정당인 독일을위한대안(AfD)은 지지율을 2위로 끌어올리며 독일 정치의 균형을 흔들고 있다. 실제로 유럽 전역에서는 극좌와 극우 세력의 부상이 전통적인 민주주의 질서를 흔들고 있으며 헝가리와 폴란드에서는 권위주의 정부가 강화돼 왔다. 일본에서는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연정 내 갈등과 경제 정책 실패로 정권의 위기를 맞고 있다.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이 정치적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킬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글로벌 민주주의가 구조적 도전에 직면해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경제적 불평등, 포퓰리즘의 확산, 정치적 양극화는 기존 민주주의 체제의 취약성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그동안 많은 국가들에게 롤 모델을 제공해 온 서구 민주주의는 동시다발적인 위기에 놓여있다.
국격 향상 어렵지만 추락은 한 순간
2024년 12월 3일 서울국제포럼과 외교부가 공동주관한 한국·유럽연합(EU) 국제회의에 에길스 레비츠 전 라트비아 대통령을 위시한 유럽의 저명한 전문가들이 모였다. 경제혁신에서, 방위산업에서, 국제안보와 국제규범의 창출에서 한국과 유럽은 이제 보다 동등한 지위에서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모두 입을 모았다. 믿어지지 않는 ‘한겨울밤의 꿈’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조찬회의에 다시 모인 참가자들은 모두들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한국 민주주의의 복원력을 믿고 응원하면서도 앞으로 당분간 리더십의 공백과 국가적 신뢰의 하락은 불가피할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미국은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며 민주적 절차와 법치주의를 강조했고 EU는 계엄 해제를 환영하며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과 시민의 자유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프랑스 언론은 한국 상황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며 계엄령 선포를 “민주주의의 심각한 후퇴”로 규정했다. 일본은 가뜩이나 위태로운 한국과의 신뢰 관계가 더욱 어려워질 것을 우려하고, 민주적 결핍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지닌 중국은 한국 민주주의의 혼란을 흥미 있게 지켜보고 있다. 국격을 높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잃는 것은 순식간이다.
긴장된 겨울, 한국의 민주주의는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질서정연하고 신속하게 민주주의의 복원력을 보여주어야 하고 새로운 도덕적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 성숙된 소프트 파워가 없이는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만들어 나갈 수 없다.
한국은 이번 계엄령 사태를 통해 대통령 권한의 분산과 정치적 협력 문화를 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완벽한 체제가 아니다. 지속적인 개혁과 대중의 신뢰 회복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체제다. 한국과 프랑스, 그리고 여러 서구 사회의 정치적 위기는 민주주의가 끊임없는 진화와 혁신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긴 겨울의 한가운데서 한국의 선택은 글로벌 민주주의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