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에 대한 ‘내란 중요 임무 종사 및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 구속영장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내란 수괴(우두머리)라고 지목했다. 이같이 내란 수괴 및 내란 모의참여·지휘·중요임무종사자 등 혐의를 구분한 건 ‘12·12 군사반란 및 5·18 내란 사건’ 판례와 동일하다.
1996년 12월 16일 서울고법은 “피고인 전두환은 내란수괴 및 반란수괴, 피고인 노태우 등은 내란 및 반란의 모의에 참여한 것으로 인정된다”며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이어 대법원도 1997년 4월 피고인들과 검사의 상고를 모두 기각하며 항소심 판결을 확정했다. 헌정사에서 전직 대통령들이 내란죄 우두머리 및 모의참여자로 각각 기소됐고 유죄가 확정된 유일한 사례다. 이 사건에서 함께 재판을 받은 피고인 16명 중 수괴는 전두환 단 한 명이다.
이처럼 형법 87조 내란죄는 ‘우두머리’(2020년 12월 개정 전 표현 ‘수괴’) ‘모의참여, 지휘, 중요임무종사자’, ‘부화수행자(부화뇌동자) 및 단순관여자’를 구분해 처벌한다. 내란죄는 총책임자인 수괴 아래 “다수인이 집단을 이루어 국헌문란 행위라는 하나의 내란 행위로 나아가는” 형태의 범죄여서 가담 정도에 따라 처벌을 다르게 정해 둔 것이다. 검찰이 김 전 장관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며 김 전 장관을 ‘중요임무종사자’로 적으면서, 내란의 우두머리로 직속 상관인 윤석열 대통령을 지목한 것 역시 이 때문이다.
‘내란수괴’ 전두환, ‘내란모의참여’ 노태우… 어떤 기준
당시 서울고법 및 대법원 1980년 5·18 내란 사건 판결문에 따르면 ‘모의참여’는 “피고인들은 국헌을 문란할 목적을 함께 가지고, (소위) ‘시국수습방안’을 수립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개별적 또는 순차적으로 모의함으로써 이미 내란집단을 형성한 것이고, 이를 기초로 (5·17)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계기로 계엄군의 위력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내란의 범의를 실현시켜 나가면서 내란집단의 구성원 상호간의 연락과 용인 하에 일련의 내란행위를 저질렀다”고 판시했다.
국회 점거, 언론 통제… 2024년과 유사한 확대계엄, “국헌문란”
법원은 특히 헌법기관인 국회를 장악한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형법상 ‘내란’으로 봤다. 대통령도 피해갈 수 없는 죄명이다. 그 직후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 김종필 공화당 총재 등을 포함해 다수 정치인들을 가장 먼저 영장 없이 체포했다. 18일 오전 1시를 기해 계엄포고령 10호가 발령됐고, 1시 45분 계엄군 소속 제33사단이 국회의사당을 점거, 8월 30일까지 의원을 포함해 출입을 통제해 임시국회 개회를 불가능하게 했다. 신군부는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 부칙으로 국회를 사실상 해산시켰다. 이후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해 실질적으로 행정권을 가져갔고, 광주에서 국헌문란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시위를 공수부대 병력을 동원해 집단 발포하는 등 무력으로 제압했다. 문화공보부를 통해 언론인 등을 협박해 해직하게 하고 언론통폐합도 강행했다.
피고인들은 ‘국헌문란의 목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5·17 이후 일련의 행위들을 모두 ‘국헌문란 목적’이라고 판단했다. “사실상 헌법기관을 강압으로 분쇄한 것과 같다”며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국헌문란을 목적으로 사전에 모의‧준비한 뒤 강압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계획한 폭동”이라고도 했다.
“내란 6개월 전 인사발령부터 모의” 부하들 대거 유죄
법원은 “내란집단 구성원 각자가 모든 행위를 인식하거나 관여할 필요가 없고, 전체로서의 내란에 각자가 의사를 가지고 기여한 바가 있는 이상 내란죄의 책임을 져야한다”고도 판결했다. 일부 피고인들이 ‘나는 중요임무종사자가 아니라 부화뇌동한 것뿐’이라고 항변한 데 대해서다.
또 당시 군인이던 피고인들이 “전두환 등 상사 지시·명령이 정당한 줄 알고 수행한 것”이라며 위법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설령 위법인 줄 알았어도 ‘군인의 상명하복 의무 때문에 거부할 수 없었다’는 주장도 했으나 “위법한 것을 알고 하지 않을 시간이 충분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재 수사 대상에 오른 12.3 계엄 관련자들 대부분은 “당일 지시받고 움직였으나 계엄인 줄 몰랐다” “계엄 발표 이후 명령을 받았으나 소극적으로 움직이라고 지시했다”며 계엄 관련 공모 혐의를 부인한다. 김 전 장관은 “내가 윤 대통령에게 계엄 선포를 건의했고, 포고령에 따라 계엄군의 국회 진입을 지휘했다”며 혐의를 시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