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여의도 일대와 광화문 인근에선 희비가 엇갈렸다. 국회는 이날 오후 5시쯤 총 투표수 300표 중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효 8표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탄핵 가결 소식에 여의도 일대엔 “우리가 이겼다”, “대한민국 만세” 같은 함성이 울렸다. 시민들은 기립해 서로 껴안고 환호했다. 광주광역시에서 온 박상현(52)씨는 “직접 봤던 끔찍한 계엄이 40년 뒤에 반복될 줄은 몰랐다. 탄핵안이 가결돼서 정말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유리(20)씨는 “대학 합격 이후 가장 좋은 순간이다. 춥다는 생각도 안 든다”고 말했다.
같은 시각 윤 대통령 옹호 집회가 열렸던 종로구 광화문 인근에선 일순 침묵이 흘렀다. 연단에 있던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이건 무효입니다. 기죽지 마십시오”라고 외치자 집회 참석자들이 호응했다. 이어 한두 명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고 15분쯤 지나자 좌석 절반 이상이 비었다. 경기 용인에서 온 박모(44)씨는 “가결될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씁쓸하다. 간첩법을 다루는 기사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순 없겠다고 생각해 나왔다”고 말했다.
포토존 된 우원식 국회의장 ‘12·3 월담’ 장소
비상 계엄이 발령된 지난 3일 우원식 국회의장이 담을 넘었던 장소엔 시민들이 인증사진을 찍기 위해 모였다. 철문엔 ‘국회의장이 비상계엄 해제를 위해 담 넘어간 곳’이라고 적힌 종이가 붙었다. 양천구 목동에서 사는 양신혁(71)씨는 우 의장의 모습을 재연하며 “상징성이 있는 장소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어 사진 찍으러 왔다”고 말했다. 인천에서 온 유연주(24)씨는 “(국회의원들이)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담을 넘은 것 같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고 했다.
여의도에선 K-팝과 이색 깃발 등장
이날 오전부터 여의도와 광화문에선 윤 대통령 찬반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여의도에선 ‘윤석열 즉각퇴진·사회 대개혁 비상행동’ 등이 주최하는 대규모 집회(신고 인원 20만명)가 오후 3시부터 예정됐지만, 아침부터 무대와 전광판·조명 등이 설치됐고 자리를 잡으려는 시민들이 모였다. 경찰은 오후 3시30분 기준 여의도에 20만명이 모였다고 비공식 추산했다.
젊은 참가자가 늘면서 정치 구호뿐 아니라 에스파·아이브·아이유 등 가수의 케이팝(K-pop)도 울려 퍼졌다. 참가자들은 소녀시대의 노래 '소원을 말해봐' 가사 중간중간에 “윤석열 탄핵”을 넣어 외치거나, 앞으로 바라는 세상을 외쳐보자며 코요태의 ‘우리의 꿈’을 불렀고, 일부는 춤을 추며 집회의 흥을 올렸다.
개성이 담긴 깃발들도 눈에 띄었다. ‘전국 퇴사자 연합 서울지부’ 깃발을 든 박모(27)씨는 “퇴사하고 유럽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려고 비자를 신청했는데 다음 날 비상계엄이 발령돼 유로 환율이 1500원까지 올랐다”며 “퇴사자를 건드리다니 (대통령을) 빨리 끌어내야겠다는 생각에 나왔다”고 말했다. 백세인(44)씨는 ‘국경 없는 음주 사회’라는 깃발을 들고 “대통령이 떨어뜨린 국격, 술로 폼나게 올리자는 취지에서 20년 된 지인들과 모임을 만들었다”며 “탄핵안 통과되면 함께 마시려고 정종을 덥혀왔다”고 말했다.
자녀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싶어 함께 나왔다는 가족 단위 참석자도 많았다. 이날 오후 1시10분쯤 5세 아이와 함께 여의도를 찾은 김모(35)·박모(33)씨 부부는 “아들에게 역사적인 순간을 보여주고 싶어서 경기 안산에서 왔다. 나라의 대장을 집에 보내는 거라고 쉽게 설명해줬는데 알아들었을진 모르겠다”고 말하며 웃었다.
올해 수능을 봤다는 김동률(18)군은 '정치와 법' 과목 시험지 모양의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그는 “윤 대통령이 교과서나 수능특강에서도 보지 못한 정치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아버지와 함께 왔다”며 “상식적이라면 국회에서 오늘 탄핵안이 통과될 거라고 기대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1학년 이은솔(16)씨는 “시험 기간이라 집회 참석을 못 해 마음이 불편했는데 어제 기말고사가 끝나서 부모님과 함께 나왔다”고 말했다.
집회 참가자를 위해 선결제 된 식당·카페·약국 등에도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가수 아이유가 팬들을 위해 음료 100잔을 선결제해둔 ‘원조 공주떡집’의 매니저 A씨는 “오전 8시30분부터 30분 만에 전량 판매됐다”고 말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박모(50대)씨는 “단골 등 10명이 직접 오거나 계좌 이체로 3만~30만원까지 다양한 금액을 결제했다”며 “비타민 음료나 쌍화탕 등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태극기 휘날린 광화문…3만명 애국가 제창
이날 대한민국바로세우기국민운동본부 등이 준비한 단상에 선 이들은 “대한민국 깨어나라”, “윤석열 대통령 화이팅” 등 구호를 외쳤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언급하며 “8년 전 이곳에서 눈물로 박 대통령님을 떠나보냈다. 윤 대통령까지 탄핵해서야 되겠냐”고 외치기도 했다. 육군사관학교·해병대 등 단체명을 적은 깃발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이날 오후 12시에 온 최강옥(77)씨는 “나라를 누가 일으켜 세웠는데 꼴이 이게 뭐냐”며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백성에게 고하는 대통령 말을 왜 모른 척하냐”고 말했다. 경기 의정부에서 온 윤송화(70)씨는 “불쌍한 대통령한테 온 나라가 개떼처럼 달려들어서 죽이려 한다”며 “국민의힘도 기를 쓰고 막아도 모자랄 판에 배신자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